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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7>연개소문은 누구

바람아님 2014. 9. 8. 09:07

고구려 멸망시킨 장본인인가, 대륙 호령한 절세영웅인가


강화도에는 연개소문과 연관된 설화와 유적지들이 많이 있다. 하점면 고인돌공원 앞에는 연개소문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이경수 씨 제공

윤명철 교수
‘연(淵)은 성이고, 개소문은 이름이다. 외모가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기운이 호방해서 작은 일에 대범했다.’ ‘잔인무도하고, 몸에는 크고 작은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

이상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를 치면서 몇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당의 명을 듣지 않아서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연개소문을 악의적으로 평가하고 전쟁을 도발하는 명분으로 삼은 것 자체가 연개소문이 뛰어나고 두려운 상대라는 반증이 아닐까?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고, 그가 추진한 정책은 고구려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연개소문은 스스로 물에서 탄생했다고 말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동부(서부?)대인인 아버지가 죽자 귀족들은 그가 대대로 내려온 직위를 계승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의 잔혹한 성품을 이유로 내세웠다. 결국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대막리지(행정과 군사를 장악한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무려 23년 동안 고구려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

그를 역사적 인물로 등장시킨 계기는 당나라와의 전쟁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로 보아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당이 갈등을 빚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은 수나라의 큰 패배를 설욕하려 했고, 한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 했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는 민란과 권력 쟁탈전 등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웠고, 국제적으로도 주변국들의 침입 등으로 불안정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는 시간이 걸렸다.

현실적으로 당나라에 비해 국력이 열세였던 고구려는 국가의 존엄을 지키면서 기존의 세력을 유지하려면 당나라 건국 초기에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만들면서, 전쟁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영류왕과 대부분 귀족들은 당과 유화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눠졌다.

영류왕은 612년 평양성 방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인물이었지만 당의 공격에 수비전과 지구전을 택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반발했다. 그는 공격전을 선호한 강경파였다. 연개소문이 당에 선제공격할 것을 주장하자 영류왕은 그를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반란을 택했다. 그는 영류왕을 추종하던 온건파 대신들 10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까지 죽인 후에 스스로 대막리지로 등극하며 정치권과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정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645년 5월, 당나라의 대공격이 육지와 바다에서 시작됐다. 요하(서만주의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강·고구려의 서쪽 경계) 전선이 무너지고 성들은 함락당했다. 안시성 전투가 벌어지자 연개소문은 즉시 압록강 방어를 맡은 15만 명의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혼성군을 파견한다.

이 혼성군은 대패하지만 성주(城主)인 양만춘은 고군분투해 안시성 방어에 성공한다. 연개소문 군대는 퇴각하는 당 태종 군대를 계속 추격하여 당 태종을 여러 차례 위기에 몰아넣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북경 근처까지 진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북경 주변에 ‘고려성’이라는 이름의 성이 있고 ‘고려’가 들어가는 지명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어떻든 당 태종은 연개소문과의 첫 대결에서 대패한 이후 647, 648년 계속해서 요동반도 해안과 압록강을 공격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죽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당시 국내 정세는 어땠을까.

642년 신라의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찾아온다. 백제를 공격하고 고구려에 우호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요구했고,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그를 옥에 가두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김춘추는 훗날 당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된다.

연개소문 상상도.
연개소문은 왜와 가까웠던 백제와 공동 군사 작전을 펼치지만 강력한 동맹관계는 맺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 도중에 왜국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고립을 타개하려 했다. 또 돌궐에도 사신을 보냈고, 멀리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도 사신을 파견했다. 당이라는 거대 제국에 맞서기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당나라는 산발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넘보기도 했지만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한 고구려 정벌을 성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665년(?)에 죽으면서 고구려의 운명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역사가들은 고구려 멸망 원인을 연개소문 사후의 내분 탓으로 돌리고 있다. 20여 년에 걸친 전쟁으로 민심이 떠났으며, 자식들이 권력 쟁탈전에 몰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큰아들인 연남생은 동생들의 배신으로 당나라로 도피했다가 도리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동생인 연정토는 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데리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절대 권력자 아들들의 권력 투쟁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의 타계 3년 후인 668년 9월에 평양성은 함락되고 고구려는 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마감한다.

역사가들은 연개소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한마디로 극과 극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임금을 죽인 역적이며 고구려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평한 반면 신채호는 ‘고구려의 대정치가이자 대장군’으로, 박은식은 ‘국가의 존엄을 지키고 대륙을 호령했던 절세의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어떻든 대한민국이 글로벌 무대의 주역으로 뻗어나가는 이때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를 우리 국내적 시각으로만 가둘 일은 아닌 듯하다. 당시 국제 정세에서 당나라를 상대로 싸워 이긴 그의 호방한 상상력을 사료 발굴과 재평가 작업으로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윤명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