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4.11.11 김태익 논설위원)
한창때 중국 당나라가 얼마나 살 만한 나라였는지 전해 오는 얘기가 있다.
"사람들은 길에 떨어져 있는 남의 물건을 줍지 않았고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상인이나 나그네들은 밤에도 마음 놓고 활동했다."
그 시대 시인 두보(杜甫)도 이렇게 노래했다.
"기름진 쌀이 창고마다 가득 찼네/
먼 길을 떠나도 길일(吉日)을 가릴 수고를 하지 않았네/
제나라 노나라 비단이 수레에 가득했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인구 100만명을 거느린 세계 최대 도시였다.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은 인구 100만명을 거느린 세계 최대 도시였다.
유럽에 동로마제국 수도 콘스탄티노플, 중동에 바그다드가 있었지만 장안에는 미치지 못했다.
장안의 번영을 이끈 것은 '정관의 치(治)'와 '개원의 치'를 이룬 황제 태종과 현종의 리더십이었다.
그러나 한나라 장건(張騫)이 개척해놓은 서역(西域)과의 교역 루트가 없었다면 영화(榮華)를 누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도자기·비단·옥·모피·차·유리·소금…. 수많은 물품을 팔고 사며 키운 부(富)를 바탕으로 장안은 세계 경제·문화의 중심이 됐다.
▶아주 오랜 옛날 로마인들은 비단이 나는 나라
사람들은 키가 6~7m쯤 되고 나이가 이백 살
되도록 오래 산다고 믿었다. 로마 황제 시저가
극장에 올 때마다 비단옷을 입은 걸 보고
귀족들이 앞다퉈 비단옷을 입는 바람에 비단
값이 치솟았다. 얼마 후 비단옷은 로마제국
서쪽 끝 변방 런던에서도 중국 낙양만큼 유행할
정도가 됐다.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중국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7000㎞ 교역로가 처음부터 '실크로드(Silk Road)'라고 불렸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호펜이 이 길로 오간 주요 상품이
비단이었다는 데 착안해 '자이덴슈트라센(Seidenstrassen·비단길)'이라고 불렀다.
이를 영어식 '실크로드'로 바꾼 것은 일본인들이었다고 한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엊그제 몽골·미얀마·파키스탄 같은 실크로드 주변 7개국 정상을 베이징에 초청해 "사회간접자본과
▶시진핑 중국 주석이 엊그제 몽골·미얀마·파키스탄 같은 실크로드 주변 7개국 정상을 베이징에 초청해 "사회간접자본과
자원 개발을 위한 '실크로드 기금'으로 400억달러(약 43조7400억원)를 내놓겠다"고 밝혔다. 이름하여 '대당(大唐) 공정'의
하나다. 실크로드 교역을 통해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던 당나라의 영광을 '신(新)실크로드'로 재현하겠다는 뜻이다.
물건이든 문화든 통하려면 길이 필요하고 새로운 세상은 그 길을 개척한 쪽이 주도하기 마련이다.
다만 중국은 당나라를 떠받친 또 다른 힘이 스스로를 활짝 열어젖힌 개방성에서 나왔다는 걸 잊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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