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 먼 쿠바 여행은 '체 게바라'의 흔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 세상 모든 젊음의 낭만, 체 게바라가 아름다운 건 권력을 마다하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우다
죽은 영원한 삶의 혁명가이기 때문이다. 쿠바,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서른 살 시절 쿠바를
여행하고 돌아온 선배가 가난이 아름다운 나라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한 달 전 꿈에 그리던 쿠바 아바나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을 맞아준 사람은 1994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주재 쿠바 대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평양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김일성대학에서
조선어학과를 졸업한 쿠바인 가이드 '호세'였다. 북한에서 사춘기를 보낸 호세는 북한 어투가 약간
섞인 한국말을 기가 막히게 구사했다.
1990년대 중반 외교관 가족들은 특별 대우를 받았지만, 평양시의 고층 아파트마저도 오전 한두 시간 승강기가 움직이다가는
멈추고 수돗물도 좀 나왔다가는 오후부터는 나오지 않았다. 대다수 평양 시민은 밤 동안 다리미를 켜놓고 자며 겨울을
이겨내기 일쑤였고, 시골에서는 얼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
호세는 통역원으로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사람이 셋이나 갑자기 사라지던 일을 잊지 못했다.
누군가가 잘못하면 나머지 친척들도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호세의 기억 속에는 나쁜 것만 있지는 않았다. 평양 시내는 놀라울 정도로 깨끗했으며, 산 중에서도 묘향산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북한 주민들은 허락을 받아야만 산에 오를 수 있기 때문에 산속은 언제나 아무도 없이 고요했다.
- 황주리 그림
호세가 북한에서 보낸 7년은 고독한 외계의 항성에서 보낸 독특한 체류의 기억이다.
잊지 못할 머나먼 쿠바 여행에서 돌아온 지 2주 만에 53년 만의 침묵을 깨고 쿠바와 미국이 국교 정상화 시대를 열게
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반가우면서도 어쩐지 허탈했다.
문득 체 게바라의 일기 중 이런 구절이 떠올랐다.
'동지여, 그게 비록 꿈일지라도 끊임없이 말하자.
우리의 꿈은 실현 가능한 일이며, 가능해야만 하며,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