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분수대] 친정 식구 여행 가기

바람아님 2014. 12. 31. 12:14

[중앙일보 2014-12-30일자] 

 

     

친정 식구들이랑 부산을 다녀왔다. 사남매 부부가 모두 함께한 여행은 부모님 돌아가신 후 처음이다. 바닷가를 낀 휘황찬란한 높은 주상복합건물들. 오랜만에 간 부산은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 홍콩인가 착각할 정도다. 목을 90도로 꺾어 위를 치켜봐야 건물 이름을 읽을 수 있는데 하나같이 영어 이름이다. 그나마 친숙한 영어도 아니다.

 시어머니가 아들 집 찾아오기 힘들게 하려고 며느리들이 어려운 영어 이름을 좋아해서 저런 이름이 많아졌다는데, 농담치곤 잔인하다. 그렇다면 내게는 살가운 친정 식구와의 이번 여행도 세 올케에게는 마지못해 참석했던 고역스러운 시집 여행일 수도 있었겠다.

 어쨌거나 부산 별미도 먹고 바다도 보며 각자에게 던지는 ‘한 해 마무리 멘트’를 끝으로 2박3일 일정의 여행을 모두 마쳤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다. 엄마 생전에는 올케들 모두 그 흔한 밉상 올케였건만 엄마 떠난 자리에서 만난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언니며 친구며 동생이었다. 엄마를 사이에 두고 얽힌 복잡한 이해관계가 우리 관계를 힘겹게 했던 모양이다. 이 나이에 슬그머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이유를 ‘나이 듦의 여유’로 봐야 하나.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다지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나이 들며 칼날이 무뎌지고 이빨이 하나씩 빠져나가는 건 ‘더 이상 힘들게 씹고 칼질하며 살지 마라’는 하늘의 뜻인지도 모른다. 다 몸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인 게다.

 사실이지 나 혼자서 씹고 칼질하며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세상이든 나라든 사람이든 바꿀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올 한 해를 대표하는 사자성어가 ‘지록위마(指鹿爲馬)’라 했다. 이제부터는 누가 사슴을 말이라고 우긴다고, 해를 손바닥으로 가린다고 펄펄 뛰며 속상해하지 않고 그걸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기로 했다. 마음을 비우고 그저 할 수 있는 일만을, 할 수 있는 만큼만 열심히 하면서 그 결과를 지켜보리라고.

 인생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씩 비워가며 사는 건지도 모른다. 내일이면 새해 첫 해돋이 보러 떠나는 사람이 많을 거다. 을미년 첫해를 바라보며 을의 마음가짐도 다짐하고 또 근심·걱정일랑 말끔히 비워버리자. 내일이면 같아도 다른 새 태양이 떠오를 터이고 또 새로운 걱정거리가 비워놓은 내 머릿속을 채우겠지만 말이다.

 ‘적을수록, 버릴수록, 느릴수록 행복이 온다’는 말대로 내년에는 적게 먹고 많이 버리고 느리게 생각하며 살련다.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