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보기에는 자식들에게
정을 주지 않고 엄하기만 한 아버지는
유독 내게 더 혹독하셨다.
맏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관심과 기대였고
둘째는 잘나서, 셋째는 똑똑해서…
공부는 물론 운동회 때
모든 종목의 상은 다 형 거였고,
또 막내는 막둥이라 봐 주고
그러니 똑똑하지도 잘 나지도 않은
중간인 나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형과 동생을 보는 아버지의 시선 또한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어루만지는 시선이었다.
어느 겨울이었다.
아버지는 젓갈 장사를 하는 작은 아버지가
젓갈 독 10개를 가져 올 것이니
잘 받아 놓으라고 하고는 나가셨다.
한참 친구들과 정신없이 놀고 있는데
작은 아버지가 마을 초입에 젓갈 독 10개를
내려놓고 바쁘다고 가셨다.
노는 데 정신 팔린 나는 젓갈 독을
집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놔둔 채
한참을 놀고 보니 10개 중 2개가 없어졌다.
외출에서 돌아 온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는
“사내 새깽이가 그러코롬
책임감이 없어서 뭣에 쓴다냐”며
당장 잃어버린 젓갈 독 2개를 못 찾겠거든
미꾸라지라도 잡아서 젓갈 독을 채우라고
나를 끌고 냇가로 가서 두꺼운 얼음을 깼다.
“이제 죽었구나.” 눈을 딱 감고 있으니
“퍼뜩 옷 벗고 들어가 미꾸라지라도 잡거라”며
얼음 구덩이로 밀어 넣으셨다.
젓갈 독을 꼭 찾아 놓겠다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봤지만
통하지가 않았고 얼음 물이 너무 차가워
죽을 것만 같아서 몸을 조금만 빼면
아버지는 긴 장대를 들고 휘휘 저어버려
다시 물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암만 생각해도 내 친아버지가 아닌 것 같고
꼭 저승사자로 보였다.
마침 윗마을에 사는 친척어른이
지나가다가 나를 꺼내 주었는데
책임감 없는 새깽이는 죽어도 싸다는
아버지에게 없어진 젓갈 독 2개를
꼭 찾아 놓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 얼음 구덩이에서 나올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젓갈 독 2개가 아까워서가 아니라
아들들에게 책임감에 대한 중요성을
심어 주고자 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다.
그랬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보이는 미소보다 더 값지고
중요하다는 걸 모르고 그저 아버지가
무섭고 두려워 야속하기만 했다.
얼음 구덩이에서 나온 그날 나는
심한 감기로 며칠 앓아누웠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구미 당기는 맛난 것을
해 먹이라고 하셨고 나는 운 좋은 날에만
얻어먹을 수 있는 흰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가,
아버지는 쌀 몇 됫박을 퍼주고 벽시계를 사셨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시계 보는 요령을
날마다 가르쳐 주셨는데
큰 바늘이 1자에 있으면 5분이고
2자에 있으면 10분 1시, 2시를 배웠다.
가난했지만 자식들의 교육열은 높았던
아버지 덕분에 형 둘은 또래들에 비해
똑똑했는데 나만은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그래서 내게 더 혹독했던 아버지를
철이 없어 어리석고 미숙했던
목으로 이해를 못했었다.
하루는 술이 취하신 아버지가
나를 불러 앉히시더니 “아그야,
12시 5분 전은 몇 시 몇 분이다냐”고 물으셨다.
1시, 2시, 3시, 5분, 10분, 15분 이런 식으로
배운 내게 갑자기
12시 5분 전이 몇 시 몇 분이냐를 재촉하셨지만
눈만 껌벅거리고 있는 내게
아버지는 “이 멍청한 돌 대갈통 봤다냐.
여지껏 그것도 모르는 놈은 사람이길
포기한 놈이니 돼야지나 다름 없응께,
시방부터 돼야지와 같이 살그라”며
그 밤에 나를 돼지 움막으로 쫓아내셨다.
느닷없는 나의 출연에 그눔의 돼지들이
어찌나 꿀꿀대며 반가워하던지
약이 올라 돼지를 발로 걷어차 버렸다.
그날 밤, 결국 똑똑한 셋째 형이
아버지 몰래 살짝 나와서 “야, 임마.
12시 5분전은 11시 55분이다”고 귀띔을 해 주었다.
“아부지 찬찬히 생각해 봉께
12시 5분 전은 11시 55분이구만요.” 해서
그 밤 죄를 면했지만 사도 세자가
그의 아버지 영조에게 미움 받아서
뒤주 안에 갇혀 죽었다는
그 꼴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 갔다 오면 소 깔과 밭일, 논일,
구분 없이 했는데 가을이면
콩을 털어내고 그 콩깍지를 소에게 먹였다.
그런데 할머니의 도리깨는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콩 등치를 향해 내려치는데
내가 내려친 도리깨는 마른 땅에 딱딱 부딪혀
그것도 못한다고 또 도리깨로 등짝이
얼얼하도록 아버지에게 얻어 맞은 날이면
콩을 한 됫박을 퍼다가
소 여물통에 넣어버리기도 했다.
냉랭하고 무섭기만 한 아버지가
나이 들고 병들어서야 내게
나긋나긋 해지셨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아버지가 익숙지 않아
늘 아버지와 마주 하는 걸 피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형이 그랬다.
아버지 등짝이 너무 졸아들어
등을 밀어 드리는데 눈물이 나더라고.
그 말이 내게는 효심을 과시하기 위한
형의 간사한 말로 들려 “뭐, 눈물까지나…” 하며
속으로 비웃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늙고 병들어 돌아가실 무렵쯤엔
못난 내가 걱정이셨던지 그 흐릿한
시야의 초점을 늘 내게 꽂아 놓은 채
고개의 각도 또한 나를 향해 있는 듯 했다.
가끔 형들에게 받은 용돈을
내게 찔러 주었던 아버지.
아버지의 낡삭은 유품을 정리하는데
“네찌 주라”는 삐뚤삐뚤한 글씨와 함께
1만 원 짜리 지폐 90장이 있었다.
울컥 눈물을 쏟으며 흐르는 눈물에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씻어버렸다.
내게 늘 인색했던 아버지의 참 마음을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알았다.
학력과 부는 비례한다고,
위로 형들은 다 잘 되어 윤택하게 살고 있는데
난 아버지의 염려대로
막노동을 하며 그럭저럭 살고 있다.
가던 날이 장날이라던가.
지난 가을 큰마음 먹고 벌초를 하고
고향집에 들르니 마치
우리 집이 헐리고 있었다.
부모님 돌아가시고 쭈욱 빈 집인 채
놔두었다가 빈 집이 점점
흉가로 변해가자 집을 팔아버렸다.
새 주인이 다시 지을 거라던 그 집이
마침 그날 헐리고 있었다.
반쯤 허물어진 먼지 낀 시야에
박살 난 사진 곽이 보였다.
시골 안방에 걸려 있던 사진들.
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순간들이
아버지의 누런 얼굴에 포개졌다.
가난했지만 결코
싸구려 미소를 짓지 않았던 아버지….
조각난 유리 사이를 비집고
아버지 사진을 챙겼다.
날카로운 유리가 손끝을 찔렀다.
손에서 피가 베어났다.
그러나 베인 손가락보다 동강난 추억으로
베인 가슴이 더 아팠던 그날.
아버지의 푸석한 얼굴이 사무치게 그리워
아버지를 부르며 속울음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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