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自然과 動.植物

[김민철의 꽃이야기] 한국 근현대 명화 100선에 핀 꽃들

바람아님 2015. 2. 20. 21:36

(출처-조선일보 2014.01.15 사회정책부 차장 김민철)

이인성의 '해당화'는 해방 임박 암시… '모자를 쓴 소녀' 옆 꽃은 샐비어
김환기 그림 속 매화는 선비 정신 상징
오지호 '남향집' 대추나무 그림자, 박수근 그림 플라타너스도 인상적
꽃보다 멋진 명화 100선이 한자리에


	김민철 사회정책부 차장 사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두 소녀와 엄마인 듯한 여인이 붉은 해당화를 둘러싸고 있다. 
멀리 바다에는 배가 떠 있고, 모래사장에선 말이 풀을 뜯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명화를 만나다-한국 근현대 회화 100선'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는 이인성(1912~1950)의 '해당화' 속 풍경이다. 
연일 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지만 이곳 그림에는 꽃들이 만발해 있다.

해당화는 산기슭에도 피지만, 그림처럼 탁 트인 바닷가 모래밭에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피기를 
좋아한다. 꽃을 만지려 다가가는 그림 속 한 아이는 조심해야 한다. 해당화 줄기에는 험상궂게 생긴 
크고 작은 가시가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해방 직전인 1944년에 그린 것이다. 멀리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있다. 
일제강점기 말, 해방이 멀지 않았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라는 것이 도슨트(전시 해설사)의 설명이다. 
그림은 한용운의 시 '해당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시는 '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봄은 벌써 늦었습니다'로 시작하는데, 
해당화에 해방의 염원을 담았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도 해당화가 해방의 감격을 함께하는 꽃으로 나온다. 
21권짜리 방대한 이 소설은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한 주인공 서희가 해당화 가지를 휘어잡고 주저앉는 
장면으로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이인성,‘ 해당화’와 임직순,‘ 모자를쓴소녀’ 작품 사진

 이인성,‘ 해당화’(사진 왼쪽)와 임직순,‘ 모자를쓴소녀’.


'모자를 쓴 소녀'는 꽃에 관심을 갖고 본 기자의 발길을 오래 

잡은 작품이다. '꽃과 여인의 화가' 임직순(1921~1996)의 

그림인데, 의자에 앉아 있는 소녀를 화면 대각선으로 배치했다.

여기에 소녀의 옷과 모자의 파란색이 의자, 모자의 띠, 

꽃의 색채와 대비를 이룬다.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으니 

한여름이고, 한여름에 저렇게 선명한 붉은 꽃이면 샐비어가 

분명하다. 여인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그 옆에 풍성한 꽃이 

있는 구도는 임직순 그림에 많이 나오는 구도라고 한다.

김환기(1913~1974)의 '영원의 노래'에서는 앙증맞은 매화를 

볼 수 있다. 그림 오른쪽 위 귀퉁이에 커다란 창문이 있고, 

창밖으로 매화 가지 하나가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이 가지에는 홍매 5~6송이가 팝콘처럼 피어 작품에 악센트를 주고 있다. 

푸른빛을 띤 녹색 배경은 은은한 느낌을 준다. 김환기는 매화와 달항아리를 많이 그렸다. 2012년 환기미술관에서 그가 그린 매화 그림만 모아 전시를 할 정도였다. 그에게 매화는 한국적인 것, 특히 우리 선비 정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중섭(1916~1956)의 '길 떠나는 가족'에도 꽃이 있다. 그림에서 남편은 아내와 아이들을 달구지에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황소 등에 있는 분홍색 꽃은 행복한 가족 분위기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중섭은 1951년 제주도 서귀포로 피란했지만, 생활고가 극심해 1952년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냈다. 

이 그림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주일간 가족을 만나고 돌아와 1954년 그린 것이다. 

경제적 안정을 이루어 다시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그림이다. 

꽃이 선명하지 않지만, 분홍색과 꽃 모양으로 보아 진달래 같다.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90)의 그림에도 꽃이 많다. '길례 언니'에는 길례 언니가 쓴 모자 테두리에 화려한 장미 등을 그렸고,회색빛 그레타 가르보의 얼굴이 있는 '청춘의 문'에도 그림 아래쪽에 백합 종류의 꽃들이 피어 있다. 

천경자 그림 속 꽃들은 특히 화려하다.


꽃에 관심을 갖고 이 전시를 본다면 김영기(1911~2003)의 '향가일취'도 빠뜨릴 수 없는 작품이다. 

화면의 아랫부분에서 위로 올라가는 수세미의 S자 구도가 압권이다. 

수묵화에서 사군자가 아닌, 수세미 같은 주변 평범한 식물을 그린 것 자체가 파격이라는 설명이다.

나무들도 적지 않게 등장하고 있다. 오지호(1905~1982)의 '남향집'에선 햇살 따스한 봄날, 커다란 대추나무가 화면 가득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청보랏빛으로 처리한 이 그림자는 내가 기억하는 그림자 중 가장 인상적이다. 

초봄에 피는 노루귀 중 청노루귀 꽃색깔과 똑같다. 빨간 옷을 입고 문을 나서는 소녀는 화가의 둘째 딸이다.

박수근(1914~1965)이 자신이 살던 창신동 골목 풍경을 그린 '골목안'에는 플라타너스들이 특유의 회백색 화강암 같은 

마티에르 기법으로 그려져 있고, 박노수(1927~2013)의 '유하(柳下)'에서는 버드나무 숲에 배가 한가롭게 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야생화에 관심이 크지 않았던 1970년대까지 그림이라 그런지 야생화는 많지 않았다. 

제목 자체가 '들꽃'인 변종하(1926~2000)의 그림도 꽃을 단순화시켜 어떤 꽃인지 알기 어렵다. 

굳이 꽃에 관심을 두지 않더라도, 꽃보다 멋진 명화 100점을 한자리에서 보는 행운을 누릴 수 있다는 점에서 놓칠 수 없는 

기회다. 기왕이면 평일 네 번, 주말 5~6번 하는 작품 설명까지 들으면 좋겠다. 

설명을 듣고 다시 작품을 보니 완전히 달라 보였다.


<주.  글에서 설명한 그림은 링크로 연결 이미지를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