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8.07
김정렴 시절 차지철이 비서실장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거나 중앙정보부장과 월권 문제로 정면충돌하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권력 내부의 균형과 질서가 헝클어진 건 김계원 비서실장이 들어서면서였다. 김계원은 차지철·김재규 둘을 조정·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말이 있지만 김정렴의 존재가 그런 경우였다.
김정렴씨를 가까이서 보게 된 건 화폐 개혁 준비가 비밀리에 진행되던 62년 5월 중순이었다. 그전까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계획을 주도한 유원식 최고위원(대령), 천병규 재무부 장관 정도만 전모를 알고 있었다. 62년 6월 10일 단행된 화폐 개혁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내자(內資) 동원을 위해 한 해 전부터 구상됐지만 미국의 협조를 얻지 못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내자 동원이 무망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외화 획득·대외 개방에 의한 조국 근대화로 경제정책이 큰 방향을 틀게 됐다.
5월 17일 정보부는 부산항에 도착할 신은행권을 안전하고 은밀하게 하역·보관·운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튿날 나는 용산 미군 비행장에서 화폐 개혁 실무 책임자인 김정렴을 대동하고 쌍발 소형 항공기 편으로 부산 제2부두로 이동했다. 하역은 장병들이 했고 현장은 차지철 대위를 비롯해 5·16 때 한강을 넘어온 공수단 대위 7~8명이 지켰다. 이틀 동안 철야작업을 하면서 김정렴의 성실한 일처리가 인상에 남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화폐 개혁 때 그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재무부와 상공부의 장·차관직을 두루 맡겼다. 김정렴은 국세청 신설, 수출 진흥, 포항제철과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 등 고도 성장의 엔진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69년 10월 21일, 박 대통령은 이후락 비서실장·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김정렴 상공부 장관과 김계원 예비역 대장(전 육군참모총장)을 각각 임명했다. 3선 개헌이 국민투표로 통과된 지 나흘 만에 단행된 인사였다. 김정렴은 이후락처럼 재간을 부리거나 뭔가를 꾸며 대통령을 혹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어떤 것을 안출해서 적극적으로 건의하고 추진력 있게 끌고 가는 스타일이라기보다 모시는 분 뒤에서 그림자처럼 보좌하는 전형적인 비서실장이었다. 김정렴의 롱런은 그의 욕심 없는 태도와 정성스러운 업무 처리를 대통령이 샀기 때문이다. 그는 청와대 관리나 경제정책 점검, 행정부 업무 조정에 충실했다. 대신 정치나 권력, 통수(統帥)에 관한 문제엔 개입하지 않았다. 내가 총리를 하던 71년에서 75년까지 김 실장과 나는 일주일에 2~4회는 만나는 사이였다. 그는 스스로 지켜야 할 선을 정해놓고 자기 분수를 넘지 않았다.
그런 김정렴이 박 대통령이 나를 자신의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뒀다는 기록을 남겨 의아해 한 적이 있다. 그는 회고록(『아, 박정희』 1997년)에 78년 유신 2기 대통령에 선출된 박 대통령이 이런 취지의 말을 자기에게 했다고 썼다. “유신헌법은 임기(78~84년) 만료 1년 전에 대통령 유고(有故)가 되면 국무총리가 남은 임기를 대행하게 돼 있다. 그러니 내가 임기 1년 전(83년)에 물러나면 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그가 자연스럽게 공화당 후보가 돼 차기 대선에 출마하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김종필을 다시 총리를 시켜야겠어.” 박 대통령이 나를 총리→대통령권한대행→대선후보→차기 대통령의 수순으로 후계 경로를 설정했다는 얘기다. 돌이켜 보면 이 경로는 내 후임인 최규하 총리가 10·26 이후 대통령에 오를 때 밟았던 수순과 똑같다. 꼭 김정렴이 아니더라도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셨던 사람 중에 내가 무슨 대통령의 뒤를 이을 사람이었던 듯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생전의 박 대통령이 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을 내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아는 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 혁명 이후 60년대 중반까지 박 대통령은 권력 의지가 완강하지 않았다. 혁명과업을 완수하면 군에 다시 돌아가겠다든가, 민정(民政) 이양을 선언했다가 불과 보름 만에 군정 연장을 발표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박 대통령이 권력의 속성을 체득하고 권력과 일체화된 건 6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성질이 있다. 잡아본 사람만이 그 속성을 안다. 권력의 가장 큰 특징은 권력을 지키겠다는 욕심이다. 말년의 박 대통령은 권력의 정상에서 끊임없이 나를 주시했다. 나는 견제와 감시가 견딜 수 없어 그 울타리에서 도망쳐 보려고도 했다. 대통령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혁명 때부터 정계를 완전 은퇴할 때까지 나는 대통령이나 1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 건 하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나 하라고 해야 한다. 내가 그런 꿈을 꿨다면 기회가 전혀 없지도 않았다. 그런 데에 집착을 하지 않았기에 여태까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혁명을 설계하고 박 대통령을 뒷받침해 나라를 극빈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것을 보람으로 여길 뿐이다.
김정렴이 밝힌 ‘김종필 후계론’은 내가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믿지도 않는다. 다만 김 실장이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내가 권력의 노예가 아니다’라는 점을 주변에 알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자신의 유고 상황을 가상해 비서실장에게만은 당신의 의중을 알려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김 실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자신이 들었다는 그 얘기를 나한테 전달하지 않았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유고 상황이 오지 않았는데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의 유고 상황이 왔을 때 김 실장은 더 이상 비서실장이 아니었다. 그때의 비서실장은 김계원이었다. 권력의 세계는 복잡하다. 권력의 음지와 양지 속을 들여다보면 참 별일들이 다 들어 있다.
박 대통령은 70년대 남북 간 긴장, 김일성과 대결 의식이 한껏 고조돼 있을 때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통령이 “내가 안보 위기의 나라를 끝까지 지켜낼 거다. 근대화 작업도 완성시킬 것이다. 조국 근대화라는 말은 자네가 내놨잖아”라고 하시길래 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기간과 내용은 한정돼 있어. 나는 그것만 할 뿐이야. 다른 욕심은 없어”라고 답했다. 대통령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다음은 임자 차례야’라든가 ‘다음을 네가 맡아서 해라’ 같은 식의 얘기는 일절 없었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후계론이기보다 권력욕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김정렴 실장은 78년 12월 총선에서 공화당 정당 득표율이 신민당보다 1.1%포인트 낮은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선거 패인으로 물가 급등에 따른 국민 불만,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상공인의 저항, 정부가 권장한 다수확 볍씨 ‘노풍’ 병충해에 따른 농민의 비판 등 경제적 요인이 지목됐다. 경제의 전반적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김 실장이 희생양으로 떠올랐다. 1.1%포인트 격차는 보기에 따라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는데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돌아가면서 김정렴 책임론을 제기하는 바람에 대통령의 마음이 흔들렸다. 김정렴씨는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분별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한계를 알고 두말없이 자리를 떴다. 차지철과 김재규는 김정렴이란 완충장치가 사라지자 노골적인 권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소사전 대통령비서실장=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핵심 권력기관장. 인사·정책·정무·사정(司正)·홍보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대통령을 보좌한다. 대통령 면접조정권을 갖고 있다. 이 시절 비서실장은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등과 협력하며 견제하는 관계에 있었다. 이후락(63~69년) 비서실장은 3선개헌 등 고도의 정치업무에 개입했으며 김정렴(69~78년) 실장은 경제관리에 전념했다. 김계원(78~79년) 실장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휘둘려 10·26 비극의 무대에 섰다. 80년대 민주화시대 이후 경호실과 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명칭 변경)의 정치 관여가 차츰 줄었지만 비서실장의 역할과 위상은 유지됐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67> 김정렴 비서실장과 JP 후계론
62년 화폐개혁 때 성실한 일처리
김정렴, 박 대통령 눈에 들어 중용
재간 안 부리고 그림자처럼 보좌
정치·권력·통수 문제는 관여 안 해
62년 화폐개혁 때 성실한 일처리
김정렴, 박 대통령 눈에 들어 중용
재간 안 부리고 그림자처럼 보좌
정치·권력·통수 문제는 관여 안 해
1971년 1월 6일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에서 주대만대사로 부임을 앞둔 김계원 전 중앙정보부장(가운데)을 접견하고 있다. 오른쪽은 김정렴 대통령 비서실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역사에서 ‘이프(If)’라는 가정은 아무 가치가 없다. 가정법은 역사를 얘기할 땐 절제해야 한다. 하지만 18년 정권, 종말의 무대에 아쉬운 대목이 없을 수 없다. 가장 큰 아쉬움은 육영수 여사가 비운에 돌아가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박정희 대통령의 면밀한 생각과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1978년 12월 9년3개월간 박 대통령을 옆에서 모셨던 김정렴 비서실장의 퇴장도 아쉬운 장면이다. 그는 청와대 최고참(69년 비서실장 임명) 측근이었다. 차지철 경호실장보다 5년 빨랐고 김재규 중앙정보부장보다 7년 앞섰다. 그런 만큼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차지철과 김재규가 비서실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김정렴 시절 차지철이 비서실장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먼저 보고하거나 중앙정보부장과 월권 문제로 정면충돌하는 일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권력 내부의 균형과 질서가 헝클어진 건 김계원 비서실장이 들어서면서였다. 김계원은 차지철·김재규 둘을 조정·관리하는 데 실패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옛말이 있지만 김정렴의 존재가 그런 경우였다.
김정렴은 21세였던 1945년 8월 6일, 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졸업생 견습 소위로 히로시마(廣島)에 근무 중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의 폭심(爆心) 2㎞ 지점 안에 있다 살아났다. 해방 후 머리가 빠지고 잇몸이 허물어지는 원자병 후유증을 하나씩 극복하고 한국은행에서 근무했다. 61년 5·16 뒤 나는 혁명과업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정부와 학계의 인재를 끌어모았다. 정보부 안에 정책연구실이라는 국가 브레인 집단을 만든 것이다. 혁명정부의 경제정책 밑그림을 그릴 전문가로 김정렴이 제격이란 얘기를 들었다. 그는 이미 자유당·과도정·민주당 정부에서 재무부 이재국장을 지내 통화 관리 실력을 보여준 바 있다. 한국은행 총재에게 김정렴의 정보부 파견근무를 요청한 게 그와 인연의 시작이었다.
김정렴씨를 가까이서 보게 된 건 화폐 개혁 준비가 비밀리에 진행되던 62년 5월 중순이었다. 그전까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계획을 주도한 유원식 최고위원(대령), 천병규 재무부 장관 정도만 전모를 알고 있었다. 62년 6월 10일 단행된 화폐 개혁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내자(內資) 동원을 위해 한 해 전부터 구상됐지만 미국의 협조를 얻지 못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내자 동원이 무망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외화 획득·대외 개방에 의한 조국 근대화로 경제정책이 큰 방향을 틀게 됐다.
5월 17일 정보부는 부산항에 도착할 신은행권을 안전하고 은밀하게 하역·보관·운송하는 책임을 맡았다. 이튿날 나는 용산 미군 비행장에서 화폐 개혁 실무 책임자인 김정렴을 대동하고 쌍발 소형 항공기 편으로 부산 제2부두로 이동했다. 하역은 장병들이 했고 현장은 차지철 대위를 비롯해 5·16 때 한강을 넘어온 공수단 대위 7~8명이 지켰다. 이틀 동안 철야작업을 하면서 김정렴의 성실한 일처리가 인상에 남았다. 박정희 대통령도 화폐 개혁 때 그의 활동을 눈여겨보고 재무부와 상공부의 장·차관직을 두루 맡겼다. 김정렴은 국세청 신설, 수출 진흥, 포항제철과 울산석유화학단지 건설 등 고도 성장의 엔진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했다.
1979년 5월 16일 5·16민족상 시상식을 마친 뒤 청와대 뒤뜰에서 김종필 의원, 박근혜(현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 김성진 문공부 장관(왼쪽부터)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오른쪽은 경호원. JP가 박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은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김정렴 전 비서실장의 회고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자신의 후계자로 JP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JP는 “그런 말을 박 대통령으로부터 들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중앙포토]
1979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김정렴 신임 주일대사에게 신임장 을 수여한 뒤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그런 김정렴이 박 대통령이 나를 자신의 차기 후계자로 염두에 뒀다는 기록을 남겨 의아해 한 적이 있다. 그는 회고록(『아, 박정희』 1997년)에 78년 유신 2기 대통령에 선출된 박 대통령이 이런 취지의 말을 자기에게 했다고 썼다. “유신헌법은 임기(78~84년) 만료 1년 전에 대통령 유고(有故)가 되면 국무총리가 남은 임기를 대행하게 돼 있다. 그러니 내가 임기 1년 전(83년)에 물러나면 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그가 자연스럽게 공화당 후보가 돼 차기 대선에 출마하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김종필을 다시 총리를 시켜야겠어.” 박 대통령이 나를 총리→대통령권한대행→대선후보→차기 대통령의 수순으로 후계 경로를 설정했다는 얘기다. 돌이켜 보면 이 경로는 내 후임인 최규하 총리가 10·26 이후 대통령에 오를 때 밟았던 수순과 똑같다. 꼭 김정렴이 아니더라도 박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셨던 사람 중에 내가 무슨 대통령의 뒤를 이을 사람이었던 듯이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생전의 박 대통령이 나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을 내게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아는 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 혁명 이후 60년대 중반까지 박 대통령은 권력 의지가 완강하지 않았다. 혁명과업을 완수하면 군에 다시 돌아가겠다든가, 민정(民政) 이양을 선언했다가 불과 보름 만에 군정 연장을 발표한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박 대통령이 권력의 속성을 체득하고 권력과 일체화된 건 60년대 후반에 들어서였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성질이 있다. 잡아본 사람만이 그 속성을 안다. 권력의 가장 큰 특징은 권력을 지키겠다는 욕심이다. 말년의 박 대통령은 권력의 정상에서 끊임없이 나를 주시했다. 나는 견제와 감시가 견딜 수 없어 그 울타리에서 도망쳐 보려고도 했다. 대통령은 그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혁명 때부터 정계를 완전 은퇴할 때까지 나는 대통령이나 1인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지 않았다. 그런 건 하고 싶어 하는 사람한테나 하라고 해야 한다. 내가 그런 꿈을 꿨다면 기회가 전혀 없지도 않았다. 그런 데에 집착을 하지 않았기에 여태까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혁명을 설계하고 박 대통령을 뒷받침해 나라를 극빈의 나락에서 건져 올린 것을 보람으로 여길 뿐이다.
김정렴이 밝힌 ‘김종필 후계론’은 내가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믿지도 않는다. 다만 김 실장이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왜 그런 얘기를 했을까. ‘내가 권력의 노예가 아니다’라는 점을 주변에 알리고 싶었을지 모른다. 아니면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자신의 유고 상황을 가상해 비서실장에게만은 당신의 의중을 알려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김 실장은 대통령으로부터 자신이 들었다는 그 얘기를 나한테 전달하지 않았다. 그건 이해할 수 있다. 유고 상황이 오지 않았는데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함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통령의 유고 상황이 왔을 때 김 실장은 더 이상 비서실장이 아니었다. 그때의 비서실장은 김계원이었다. 권력의 세계는 복잡하다. 권력의 음지와 양지 속을 들여다보면 참 별일들이 다 들어 있다.
박 대통령은 70년대 남북 간 긴장, 김일성과 대결 의식이 한껏 고조돼 있을 때 나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대통령이 “내가 안보 위기의 나라를 끝까지 지켜낼 거다. 근대화 작업도 완성시킬 것이다. 조국 근대화라는 말은 자네가 내놨잖아”라고 하시길래 내가 “무슨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다. 박 대통령은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기간과 내용은 한정돼 있어. 나는 그것만 할 뿐이야. 다른 욕심은 없어”라고 답했다. 대통령의 말은 거기까지였다. ‘다음은 임자 차례야’라든가 ‘다음을 네가 맡아서 해라’ 같은 식의 얘기는 일절 없었다. 대통령의 이 발언은 후계론이기보다 권력욕이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김정렴 실장은 78년 12월 총선에서 공화당 정당 득표율이 신민당보다 1.1%포인트 낮은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당시 선거 패인으로 물가 급등에 따른 국민 불만, 부가가치세 도입에 따른 상공인의 저항, 정부가 권장한 다수확 볍씨 ‘노풍’ 병충해에 따른 농민의 비판 등 경제적 요인이 지목됐다. 경제의 전반적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김 실장이 희생양으로 떠올랐다. 1.1%포인트 격차는 보기에 따라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는데 김재규 정보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돌아가면서 김정렴 책임론을 제기하는 바람에 대통령의 마음이 흔들렸다. 김정렴씨는 나아갈 때와 물러갈 때를 분별하는 사람이었다. 자기 한계를 알고 두말없이 자리를 떴다. 차지철과 김재규는 김정렴이란 완충장치가 사라지자 노골적인 권력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소사전 대통령비서실장=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핵심 권력기관장. 인사·정책·정무·사정(司正)·홍보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대통령을 보좌한다. 대통령 면접조정권을 갖고 있다. 이 시절 비서실장은 경호실장, 중앙정보부장 등과 협력하며 견제하는 관계에 있었다. 이후락(63~69년) 비서실장은 3선개헌 등 고도의 정치업무에 개입했으며 김정렴(69~78년) 실장은 경제관리에 전념했다. 김계원(78~79년) 실장은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휘둘려 10·26 비극의 무대에 섰다. 80년대 민주화시대 이후 경호실과 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 등으로 명칭 변경)의 정치 관여가 차츰 줄었지만 비서실장의 역할과 위상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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