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時流談論

[데스크에서] 전임자가 한 것? 다 바꿔!

바람아님 2017. 4. 13. 09:10

(조선일보 2017.04.13 이인열 산업1부 차장)


한 전직 관료와 저녁식사를 하다가 그로부터 "왜 군사정권 때보다 문민정권 이후 인사(人事)가 더 엉망인지 아는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어진 그의 설명은 이랬다. 

"군인들은 TV가 고장 나면 사병 중에 전자공학과 출신부터 찾는다. 

물론 전자공학을 공부했다고 TV 고치는 기술을 아는 건 아닐 테지만 전문가를 찾아내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식이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 문민정부 이후엔 늘 이전 정권에 '부역'한 인물을 배제하는 지우개 인사만 했다. 

그러다 보니 인재가 축적되지 않은 한국 사회에서 더더욱 2류, 3류들이 득세한 측면이 있다."


지우개 인사는 정치권이나 정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최근 만난 한 대기업 임원은 "정말 힘든 건 임기 2~3년의 CEO(최고 경영자)들이 올 때마다 늘 새로운 사업 계획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국가도 단임제 병폐에 시름하고 있지만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베이비붐 세대의 끝물이어서인지, 게다가 인사의 숨통을 틔워주어야 한다는 명분까지 더해져 상당수 기업 CEO들의 수명은 

대부분 2~3년 단임으로 끝난다. 그런데 새 CEO가 오면 어김없이 전임 CEO가 중용하던 인물을 밀어내는 인사안부터 

만드느라 여념이 없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겨우 틀을 잡아 진행하던 전임 CEO의 중점 사업도 죄다 뒤집어엎고 

부서마다 신규 사업보고서 작성하느라 총력전을 펼친다고 한다.



/조선일보 DB


지금 우리 국가나 기업들이 맞닥뜨리는 문제들은 몇 개월 만에 뚝딱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이고 장기적인 해법을 요구하는 

난제이다. 그런데 이를 단기간에 풀려고 덤벼드는 것도 모자라 기존에 있던 사람, 이미 진행 중이던 해법을 일단 배제하고 

나서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끝을 보는 것이 없다.


기업의 변화 욕구를 탓할 의도는 없다. 모든 CEO들이 변하고 싶어하는 것도 존중한다. 

그런데 '경영이란 무엇인가'의 저자 조안 마그레타가 책에서 한 

"변하려면 변하면 안 되는 것을 찾아내면 된다.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면 안 바꿔야 하는 것을 찾아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는 지적도 염두에 뒀으면 한다. 

경영 현장은 물론이고 사회 곳곳에는 때로는 과도한 변화 욕구와 시도가 '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우리가 변화를 원하는 이유는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기 때문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움직임 못지않게 '변화를 위한 변화'도 경계해야 한다.


'적폐 해소' '대청소' 같은 구호가 난무하는 대선 판국에 뛰어들었던 이가 

"경제·복지 정책 등은 이전 정부 것을 계승하고 수정하는 '온고지신(溫故知新) 노선'을 내세우겠다"고 한 발언이 

신선했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지울 게 있으면 지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은 '지우개 인사'에다 '지우개 사업' '지우개 정책'만 횡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