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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1577년, 100일간의 언론자유

바람아님 2017. 6. 21. 08:41
경향신문 2017.06.20. 20:56


“과인이 우연히 (활자로 인쇄된) 조보를 보았다. 누가 임금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멋대로 만들었는가.” 1577년 11월28일 선조가 길길이 뛴다. 조보는 행정업무 사항을 알려주는 일종의 관보다. 중앙이나 지방 관청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열람해왔다. 그런데 약 100일 전인 8월부터 서울의 ‘직업 없는 식자들’이 의정부의 허락을 얻어 조보를 인쇄하여 구독료를 받고 배포하기 시작했다.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는 “조보를 받아본 독자(사대부)들이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했다.


그러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선조는 “누가 감히 이 따위로 일을 처리했냐”면서 “조보를 인쇄하고 유료로 배포한 자들과 이를 허락해준 자를 색출하라”는 비망기를 내렸다. 조보를 발행한 30여명이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보다 못한 사헌부가 “그들은 고의로 범법행위를 한 게 아니며 그저 구독료만 챙기려 했을 뿐”이라고 변호했다. 그러나 선조의 노기는 가시지 않았다. 결국 업자 30여명은 유배형을 받았다. 조보의 민간발행은 그렇게 단 100여일 만에 언론탄압으로 끝났다.


지난 4월 경북 용화사 주지 지봉 스님이 입수한 바로 그 1577년 11월 중의 ‘민간인쇄조보’ 5쪽에는 흥미로운 기사들이 많다. “서울에 소전염병이 창궐하여 수레를 끌던 소 600마리가 쓰러져 죽었다. 사람들이 구슬피 울고 있으니 그 참상을 차마 볼 수 없다.”(1577년 11월15일) 빙고에 저장할 얼음을 실어나르는 공역 중에 지금의 구제역 같은 전염병이 돌아서 소들이 떼죽음 당하고 있다는 기사다.(사진) 조보는 “이대로 공역을 강행하면 백성의 원성을 누그러뜨릴 수 없다”고 기록했다. 임금(선조)이 기상이변의 책임을 지고 사직서를 제출한 신료들의 사표를 반려하는 내용도 있다. 임금이 “모든 허물은 외람되게 임금의 보위를 받잡은 과인에게 있다”고 자책하고 있다.


호화가마를 타고 다니는 병마절도사(지역사령관)를 비판하는 기사도 등장한다. “저렇게 편안한 가마만 타고 다니다가 전쟁이 나면 어쩌려는가. 저런 장수가 쌩쌩 달리는 말을 타고 활이나 칼창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겠는가.”(11월 날짜 미상의 조보) 조보에는 각 지방이나 대간들이 올리는 보고서나 상소문, 심지어는 임금의 자책문까지 여과 없이 실려 있다. 김영주 경남대 교수의 말마따나 당시 조보는 사회의 정치와 생활상을 전하는 생생한 고발 및 비판기사를 실었다. 요즘의 언론에 견줘도 손색이 없다.


<이기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