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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육조대로, 정치·사회의 중심지였다

바람아님 2017. 6. 17. 10:03
세계일보 2017.06.15. 21:02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서 소개

서울 광화문 앞에 위치한 세종대로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거리다. 세종대로는 조선왕조 500년과 근·현대의 정치 사회 변혁의 중심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로를 ‘육조대로’(六曹大路)라 불렀다. 나라의 최고 관청인 육조가 좌우로 늘어선 큰 길이었다. 육조대로의 북쪽 끝에는 조선의 국왕이 사는 경복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육조대로에서는 왕의 행차를 비롯해 외국 사신들의 행렬이 지나고, 과거 시험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열렸다. 부당한 일을 겪은 백성들은 육조대로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렇듯 육조대로는 조선시대 가장 크고 중요한 도로였지만, 당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려주는 사료는 그리 많지 않다. 20세기 초반에는 육조대로의 길이가 약 550m, 폭이 55∼88m였다. 조선시대의 도시 설계가 크게 변한 적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500∼600여년 전에도 비슷한 규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0년대 광화문 앞 육조대로의 모습. 육조대로에서는 왕의 행차를 비롯해 
외국 사신들의 행렬이 지나고, 과거 시험을 비롯한 각종행사가 열렸다. 
서울시 제공

김동욱 경기대 명예교수는 “육조대로는 조선시대에 구경꾼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 곳이었다”며 “왕의 행렬이나 중국 사신들의 출입, 이런 행사에 수반돼 이뤄진 산대놀이가 도성민에게 개방됐다”고 말한다.


김 명예교수는 신간 ‘서울의 다섯 궁궐과 그 앞길’에서 육조대로를 비롯한 조선시대 궁궐 앞 길들을 소개한다.

저자는 “지금까지 궁궐에 대한 관심은 궁궐을 둘러싼 담장 안쪽 세계에 치우쳐 있었다”며 “궁궐 앞 길은 궁궐과 도시를 연결하는 숨통과 같은 존재이므로, 담장 안과 밖을 아울러 살펴봐야 궁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광화문외제관아실측평면도. 20세기 초 육조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집 제공

경복궁은 조선시대의 법궁이었지만, 왕이 머문 기간은 조선왕조 500여년의 절반 수준이었다. 왕들은 경복궁에 머물지 않는 기간에는 창덕궁에 주로 거처했다. 고종은 재위 말년을 덕수궁에서 보냈다. 왕의 거처가 달라지면서 왕의 행차나 사신의 방문 등 행사도 바뀌었다. 창덕궁에 머무는 동안에는 돈화문 앞길이 육조대로를 대신해 각종 행사장으로 쓰였다. 돈화문 앞길은 폭이 25m를 넘지 않아서, 육조대로와 다른 소박한 느낌을 줬다. 저자는 1785년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정조의 말을 인용하여 ‘대궐(창덕궁) 밖 길 좌우가 모두 초가집들이기 때문에 모양을 이루지 못했다. 경복궁 앞길은 육조와 백사(百司·모든 벼슬아치)가 좌우에 늘어서 있는 데다 규모가 반듯반듯하다’고 당시 모습을 설명한다.

창경궁 앞길은 경복궁, 창덕궁 앞길과 비교하면 구조가 전혀 달랐다. 지금도 광화문과 돈화문에서 보면 길이 앞으로 뻗어 있지만,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앞에는 길이 옆으로 나 있다. 저자는 “모름지기 궁궐의 정문 앞길은 앞으로 뻗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홍화문 앞에는 정원인 함춘원의 언덕이 가로막고 있었다”며 “홍화문은 문 앞에 놓이는 월대가 짧고 단출한 점도 특징”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이 길들에서 옛날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불가능하다”면서 “길 주변 건물들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고, 길 폭도 확장되어 옛 모습을 잃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함부로 길을 넓히거나 큼직한 건물을 짓는 일을 피하고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고도 신중하게 다듬어 나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권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