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보다도 더 영화를 사랑한 소년이 있었다. 토토는 '시네마 천국'에 출연해서 번 돈으로 고향에 슈퍼마켓을 냈지만 소년은 열
여섯 되던 해(1967년)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무일푼으로 마드리드에 입성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소년은 먹고 살기 위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한때 그는 마요르 광장 부근의 엘 라스르토 벼룩시장에서 중고물품을 팔기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영화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돈을 모았지만 프랑코 총통의 독재 치하에서 국립영화학교는 강제 폐교당한 상태였다. 결국 소년은 돈벌이하고 남은 시간 틈틈
이 혼자 영화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히치콕,베르히만,펠리니,조지
쿠커의 영화는 그에게 살아있는 교과서가 됐다.
소년은 그란비아와 인접한 말라사냐와 추에카 일대의 삼류 극장에서 고전 명작들을 보면서 감독의 꿈을 키워갔다. 그로부터 6년
의 세월이 흘러 소년은 어느 새 22세 청년이 돼 국립전화회사인 텔레포니카에 취직한다. 첫 월급으로 그는 가장 먼저 코닥에서
나온 '슈퍼-에잇' 8㎜ 비디오 카메라를 장만한다. 스페인의 세계적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입문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생활의 안정을 찾은 알모도바르는 본격적으로 문화 활동에 뛰어든다. 동성애,창녀들의 삶을
주제로 한 8㎜ 실험 영화를 제작하고 연극대본을 집필함과 동시에 아마추어 극단 배우로 활동한
다. 한편으론 글램 록 그룹 멤버로 활동하면서 부당하게 억압받는 동성애자들의 처지를 일깨우고
자 했다. 1970년대 초 마크 볼란,데이비드 보위 같은 영국 뮤지션들에 의해 주도된 글램 록은
여성의 복장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남성뮤지션들이 반 전통적의 메시지로 대중의 호응을 얻었는
데,대부분은 동성애자이거나 양성애자였다. 알모도바르 감독도 동성애자로 잘 알려져 있다.
알모도바르는 특히 독재자 프랑코가 죽은 후 일어난 전위적 문화운동인 마드리드 무브먼트의
중심 인물이 된다. 독재 치하에서 획일성을 강요당했던 예술은 민주화의 분위기 속에서 무한대의
자유를 만끽한다. 이 운동은 그란비아 부근의 말라사냐와 추에카 일대를 무대로 꽃피었다. 알모도
바르는 영화를 통해 인습에의 저항,독재 종식과 새 시대 도래에 따른 기쁨과 활기찬 사회 분위
기를 그려 갈채를 받았다. 1989년 '노이로제 직전의 여인'으로 고야상 5개 부문을 석권,스페인
영화계에서 입지를 든든히 다진 그는 1989년에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마뉴엘라라는 여인이 자동차 사고로 아들을 잃은 후 좌절을 딛고 자신의 인생을 다시 일궈나간다는 이 영화는 마드리드와 바르
셀로나를 오가며 전개된다. 마뉴엘라에게 바르셀로나는 매춘부로 살았던 자신의 과거와 가슴 성형을 통해 여성이 되고 싶어 했
던 남편 에스테반과의 어두운 기억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그녀는 임신을 계기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숨긴 채 바르셀로나를
떠나 마드리드에 정착한다. 마드리드에서 키운 에스테반은 극작가를 꿈꾸는 열일곱의 청년으로 성장하지만 어머니의 인생을 다
룬 시나리오를 만들던 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녀는 평소 아들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남편에게 아들의 죽음을 알리기 위해 바르셀로나로 간다. 그러나 마뉴엘라는 거기서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로사 수녀를 알게 되는데 놀랍게도 그녀의 뱃속에선 자신의 전 남편인 롤라(남편 에스테반의 여자
이름)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롤라는 에이즈에 걸려있었고 로사도 진단 결과 감염됐음이 밝혀진다.
결국 로사는 출산 중 사망하고 마뉴엘라는 새로 태어난 아이 에스테반을 입양해 다시 마드리드로 향한다. 마드리드에서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기적적으로 에이즈의 발병 가능성에서 벗어난다. 남편을 포함한 세 명의 에스테반,남성과 여성을 오가는
남편과 옛 친구 등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한결같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그러나 주인공 마뉴엘라는
모든 혼란과 어려움을 극복,과거의 아들 에스테반을 앗아간 마드리드에서 또 다른 아들 에스테반을 키우며 다시금 희망의
찬가를 부른다.
영화 속 마뉴엘라가 겪은 고난과 정체성 혼란의 역정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가 겪어온 현대사의 역정을 그대로 닮았다. 1936년 내란에서 승리한 후 1975년까지 40여년간 스페인을 지배한 프랑코 총통 시대의 문화계는 가사상태나 다름없었다. 프랑
코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수많은 에스테반을 숙청했다. 모든 문화 활동은 민족주의로 획일화됐다. 스페인의 문화적
정체성을 정립한다는 미명 아래 투우와 플라멩코가 국가적 전통으로 장려되고 지역적,국지적 전통은 폐기됐다. 언어도 카스티
야 어를 공용어로 지정했고 카탈루냐어,바스크어 등은 금지됐다. 1940~1950년대에는 학교에서 아예 방언을 사용할 수 없게
했고,광고와 간판도 카스티야 어만 허용됐다. 숨 한 번 제대로 쉴 수 없는 철권통치 아래 문화적 다양성과 지역 문화의 전통은
철저히 짓밟히고 말았다.
프랑코의 죽음과 함께 찾아온 마드리드의 봄은 잊힌 전통을 되살리고 이웃 나라로부터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에스테반을 키워가는 전환점이 됐다. 과거 반체제,반문화 운동의 중심 무대였던 말라사냐와 추에카 일대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는 젊음의 용광로로 탈바꿈했다. 스페인 광장과 시벨레스 광장을 동서로 연결하는 마드리드의 중심가인 그란비아의 북측
이 바로 이 지역이다. 지도상으로 마드리드의 한 가운데에 있다. 남북으로 뻗은 푸엔카랄 거리 왼편이 말라사냐 지구,그
오른 편이 추에카 지구다. 마드리드 무브먼트의 중심지였던 말라사냐 지구는 극장,라이브 카페와 바가 밀집한 곳으로 최근에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을 한 덕분에 한결 밝고 매력적인 향기를 발산한다. 영화 속에서 에스테반이 연극을 보며 꿈을 키운 곳도,
불의의 사고로 스러진 곳도 이곳이었다.
말라사냐와 함께 마드리드 무브먼트의 영향권에 속했던 추에카 지구는 마드리드시의 정비 노력에 힘입어 레스토랑,바와 개성
적인 디자인의 부티크들이 한데 어울려 아방가르드 문화의 산실로 떠오르고 있다. 이곳은 파리의 마레지구처럼 게이들의 천국
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제 마드리드에서 프랑코의 그늘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거리에는 마뉴엘라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로사의 아들인 수많은 에스테반들이 저마다 희망을 간직한 채 활보하고 있다. 이곳에 더 이상의 금기는 없다. 오로지 '금기'만이
금지될 뿐이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 피카소 '게르니카'까지…알고 보면 예술품 寶庫
마드리드는 예술의 보물창고다. 예술품 하면 파리와 런던,암스테르담을 떠올리기 십상이지
만 마드리드의 예술적 자산은 이 도시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마드리드에서 놓쳐서는 안 될 미술관은 세 곳.프라도 미술관과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소피아 왕비 미술관이다. 모두 시벨레스 광장과 카롤로스 3세 광장 사이에 있다.
프라도 미술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로 꼽힌다. 모두 90여개의 전시실을 대충 둘러본다 해도 하루는 족히
걸린다.
그래도 엘 그레코,무리요,벨라스케스,고야의 명품들을 보다 보면 다리 아픈 줄도 모른다.
반 에이크의 '수태고지' 등 명품이 즐비하다.
스페인의 현대미술을 보려면 소피아왕비 미술관으로 가야한다. 2차대전 때 독일군의 게르니카 폭격을 지원한 프랑코 총통의만행을 고발한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1960년대 프랑코의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한 팝 아트 그룹인 에퀴포 크로니카의 작품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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