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敎養·提言.思考

[마음산책] 나는 못해요

바람아님 2017. 12. 14. 09:29


중앙일보 2017.12.13. 01:40


피나는 노력으로 해내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고
내 길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 아닐까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이규경 시인의 ‘용기’라는 글이 소개됐다. 그 시를 읽고 있자니 왠지 모를 감동과 예전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시는 용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넌 충분히 할 수 있어”로 시작한다.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용기를 내야 해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었습니다 용기를 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못해요


이 시는 허를 찌르는 반전이 있다. 당연히 “열심히 노력해서, 용기를 내어서 기필코 제가 해내겠습니다”고 이 시대 미덕과도 같은 말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나는 못해요”라는 진솔한 고백으로 끝이 난다. 이 시를 통해 시인은 독자들에게 묻는 듯했다. 피나는 노력을 해서 기필코 해내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고, 자기는 못한다고,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용기가 아니냐고 말이다. 정말로 맞는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교학 교수가 되어 7년간 미국 학생들을 가르쳤던 것도 내가 정말로 원해서 한 것이라기보다는 주변에서 ‘당연히 그 길을 가겠지’라고 예상한 길로 걸어갔던 것 같다. 대학원에서 종교학을 공부할 당시 내 눈에는 졸업 후 미국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는 선배들만 보였다. 교수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내 주변 동료나 교수님들로부터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어느새 나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내 미래를 정하는 일을 나 자신에게 물어본 것이 아닌, 남들이 어찌하는지 옆을 보며 따라 했던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그런데 막상 교수가 돼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교수 세계에서 중요한 일은 학생들에게 애정을 쏟으며 잘 가르치는 일이 아니었다. 논문을 빠른 시간 안에 최대한 많이 쓰는 것, 외부로부터 큰 연구비를 잘 따오는 것, 그런 것들이 학교 안에서 인정받고 승진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들 엄청나게 바빴다. 전 세계 여러 학회들을 찾아다니면서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고 다른 학자들과 네트워킹하는 것 역시 중요했기에 잘나가는 교수일수록 학교를 비우는 날이 많았다.


교수 생활 4년 차에 접어들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뛰어난 학자가 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논문을 쓰긴 썼지만 나는 시간이 오래 걸렸고, 연구비를 따오는 일도, 다른 학자들과 네트워킹하는 것도 내성적 성격이라 적극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도자의 길이 좋아 승려가 된 만큼 내 수행에 도움을 받고 싶어 종교학을 공부한 것이지 옛 종교인에 대한 연구 논문을 쓰려고 공부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수행자가 아닌 학자로 사는 것이 별로 재미가 없었다.


행복의 요소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바로 ‘삶의 주도성을 내가 가지고 사는가?’ 하는 점이다. 즉 지금 하는 일이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해서 하고 있을 때 사람은 행복하다고 느낀다. 내 주도성이 없을 때는 그게 아무리 남들이 재미있는 것이라고 해도 힘겨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세상 많은 사람이 그 주도성을 잃고 산다. 왜냐하면 바로 이 길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못한다고 용기 내어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처럼 자신의 미래를 내 스스로가 아닌 옆 사람들을 보면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한국인』을 쓴 허태균 교수님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행복해지려면 포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한다. 무언가를 포기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안 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에게 더 맞는 다른 일을 하기로 스스로 선택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안정된 삶을 보장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은 무척이나 두렵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처음 미국 교수 자리를 그만두고 서울에다 마음치유학교를 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반대가 심했다. 그리고 처음엔 나도 많이 막막했다. 하지만 그 막막한 기간을 견디고 나니 3년이 채 되지 않는 지금, 40명의 선생님과 함께 한 해에 3000여 명의 사람들이 치유와 성장을 하는 의미 있는 곳이 됐다.


올해 고시에서 또 떨어졌다면서 나를 찾아오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그 친구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나는 못해요”라고 해도 됩니다. 나에게 맞는 길을 남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에게 물어보면서 잘 찾다 보면 고시에 붙은 것보다 결국엔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요.


혜민 스님 마음치유학교 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