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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옥의 말과 글] [26] 치매 걸린 남편의 따뜻한 손

바람아님 2017. 12. 16. 08:49

(조선일보 2017.12.16 백영옥 소설가)


백영옥 소설가백영옥 소설가


초년의 운도, 중년의 성공도 최후의 승리는 아니다.

인생의 마지막 챕터에 들어서면 새로운 판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정치 칼럼니스트 마이클 킨슬리는

"당신이 얼마나 오래 살게 되는지, 노화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되는지,  암이나 파킨슨병을 피하는 데

성공하는지 실패하는지, 이 모든 것은 이전 라운드에서 당신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했던 요소들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바로 거기에 삶의 정의가 존재한다"고 말했다.


치매는 거인의 생애를 살아온 사람에게도 가차 없다. 1980년대 세계 정치를 호령한 레이건과 대처도 말년을 치매 환자로 살았다.

인생의 말년, 우리는 대부분 투병과 간병 사이를 오간다.

소설가 모리타 류지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본 간병 일기 '아버지, 롱 굿바이'에서 "십 년 동안 아버지를 간병한 것은

십 년에 걸친 아버지와의 이별이기도 했다"고 썼다.  미국에서는 치매의 한 종류인 알츠하이머를 '롱 굿바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이 병이 길고 느린 작별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뜻일 거다.


'낯선 이와 느린 춤을'은 기자 메릴 코머가 쓴 19년간의 간병 기록이다. 의사였던 남편이 어느 날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렸다.

책은 "나와 한집에 사는 이 남자는 내가 사랑해서 결혼했던 그 사람이 아니다"란 말로 시작된다.

"그이는 과거에 살아왔던 인격과 앞으로 살아가게 될 인격 사이의 경계에 서 있었다.

한동안은 두 세계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것이 가능했다. 어떤 날에는 지성이 넘치고 같이 있으면 재미있는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그러다가는 갑자기 그의 눈빛이 거슴츠레해졌다."


그녀는 남편의 몸은 늘 함께하지만 정신은 그럴 수 없음을, 각자 소통 불가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함으로 짊어져야 하는 삶의 무게는 과연 얼마일까.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

책을 읽는 동안 사랑과 삶의 관계, 인생의 진짜 성공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인생의 마지막에 낯선 이와 춤을 추게 되더라도, 마주 잡은 그 손이 따뜻할 그런 사람이 내겐 있는가.
         



낯선 이와 느린 춤을 : 아주 사적인 알츠하이머의 기록
메릴 코머/ 윤진/ MID(엠아이디) / 2016/ 329 p.
844-ㅋ484ㄴ/ [정독]어문학족보실(2동1층)/  [강서]3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