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만물상] 동양인 혐오증

바람아님 2020. 2. 10. 12:36

(조선일보 2020.02.10 한현우 논설위원)


우한 코로나 사태 이후 주변에서 중국 여행을 계획했던 사람들이 모두 취소했고, 일본과 동남아 여행을 취소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이젠 미국이나 유럽 여행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감염 위험보다 '해코지 위험'을 염려한다.

최근 주독일 한국대사관은 "동양인에 대한 경계와 혐오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며 교민들에게 신변 안전에 주의를

당부하기도 했다.


▶동양에 대한 서양의 공포 내지 혐오는 4~5세기 훈족이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시작됐다고 한다.

13세기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단일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 제국도 지금껏 서양인들 머릿속에 공포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19세기 말 황화론(黃禍論)을 제기했다.

동양인들이 서양을 정복할 수도 있다는 주장으로, 일본을 견제하고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그는 1900년 중국 베이징을 침공하면서 "650년 전 몽골인들에게 당한 치욕을 갚아주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2차 세계대전은 서양 세계가 동양인의 위협을 실감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일본이 진주만 폭격에 성공했을 때 동양에 대한 서양의 혐오와 공포는 극대화됐다.

영화 '혹성탈출'의 원작 소설을 쓴 프랑스 작가 피에르 불은 2차 대전 당시 인도차이나에서 일본군에 억류된 경험에서

영감을 얻어 원숭이가 지배하는 지구를 상상해 냈다고 한다.


▶중국인에 대한 혐오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번졌다.

대공황 당시 미국 노동자들은 중국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며 '황화론'에 크게 공감했다.

이런 반감엔 190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번진 전염병이 차이나타운의 불결한 환경에서 비롯됐다는 믿음도

크게 작용했다. 지금 트럼프 인기가 식지 않는 이유 중 하나도 '중국 때리기'라는 분석도 있다.


▶원래 서양인은 동양인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하층민들이 아니면 그런 우월의식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우한 폐렴이 세계로 번지면서 서양인들이 동양인들에 대해 마구잡이로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다.

거리와 식당, 상점에서 전에 없던 일을 당하고 택시 승차가 거부되기도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동양인들이 옮기는 병'으로 잘못 아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질병이 편견을 낳는다는 말을 실감한다. 중국 당국이 이 사태에 큰 책임을 져야 하지만 중국인들은 피해자들일 뿐이다.

지금 말로 못 할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철저한 방역대책을 세워야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중국인 혐오'엔 빠지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