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2015-5-11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어제 모스크바의 무명용사 묘를 찾아 헌화하고 머리를 숙였다. 묘소에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군대와 싸우다 전사한 러시아 군인들이 묻혀 있다. 독일 외교장관도 7일 2차 대전 최대 격전지인 볼고그라드(옛 스탈린그라드)의 군 묘지를 참배하고 “나치가 볼고그라드 시민과 군인들에게 준 고통은 매우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주재한 2차 대전 승전 70주년 퍼레이드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나치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미국과 일본도 전쟁의 구원(舊怨)을 풀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지난달 ‘공동 비전 성명’을 통해 “2차 대전 이후 70년간 세계 평화와 안전, 번영에 기여한 파트너십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며 “과거의 적대국이 부동(不動)의 동맹이 된 것이야말로 화해의 힘을 과시하는 모델이 됐다”고 밝혔다. 미 의회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다음 날인 1941년 12월 8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했던 자리에 아베 총리가 서서 연설을 하도록 배려했다.
▷2차 대전의 주요 당사국 가운데 아시아 핵심 국가인 한국 중국 일본 사이의 화해만 남은 듯하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일본이 도쿄 만에 정박한 미국 전함 미주리호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9월 2일을 기념하는 열병식을 준비하고 있다. 전쟁 피해국이 화해의 마당을 준비하고 가해국의 호응을 기대하는 방식이다. 시 주석이 아베 총리를 초청했으니 그가 결단만 하면 길이 열린다.
▷박근혜 대통령은 러시아가 나치의 항복을 받아 낸 9일 승전 기념식에 초청받았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나치의 항복이 우리와 직접 관련이 없는 데다 북한 김정은의 참석 여부까지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참석했다 해도 외교적 실익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9월 베이징 행사는 지나쳐서는 안 될 기회다. 한중이 힘을 합치면 일본이 70년 전 전쟁을 청산하는 ‘화해의 물결’을 쉽게 거부하지는 못할 것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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