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태평로] '태평양 국가' 日本

바람아님 2015. 5. 8. 08:44

(출처-조선일보 2015.05.08 이선민 여론독자부장)


	이선민 여론독자부장
아베 일본 총리가 식민 지배와 일본군위안부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에 관심이 집중돼 있던 지난달 29일 
미국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그 못지않게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일본의 대외 전략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중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베 총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미국의 '재균형' 정책을 철두철미하게 지지한다"고 밝힌 뒤 "일본은 호주·인도와 전략적 관계가 깊어졌다. 
아세안 국가와 한국과도 다방면에 걸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일본의 외교 우선순위에서 2007년 
안보조약을 체결한 호주, 몇 년 전부터 급속히 가까워진 인도는 물론 동남아시아 국가들보다도 한국이 
뒤에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아베 총리의 이번 연설은 '태평양 국가'라는 그의 목표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그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앞둔 2014년 4월 구미(歐美) 언론에 기고한 '일본의 두 번째 개국(開國)'이란 글에서 
'일본은 더 이상 자신을 극동(極東·Far East)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환(環)태평양 지역의 중심에 있다'고 했다. 
19세기 말 일본의 첫 번째 개국을 주도한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그도 일본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동아시아 나라들과 
거리를 둘 준비가 돼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일본을 '동북아시아'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고 '한·중·일'이라는 표현에 익숙한 한국으로서는 아베 총리의 입장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지리적·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한국을 그렇게 홀대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의문은 일본이 '아시아 국가'와 '태평양 국가'의 이중(二重)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풀린다.

섬나라 일본은 한반도를 통해 건너간 아시아계(系)와 남태평양에서 올라온 폴리네시아계(系)가 만든 고대 문명에서 출발했다. 미국 문화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 이해의 고전으로 꼽히는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천황(天皇)이 태평양의 섬들에서 
발견되는 '신성한 추장(Sacred Chief)'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일본의 이중성은 이후 계속됐다. 2000년 가까이 아시아의 국제 질서였던 조공(朝貢) 체제의 외부에 위치했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아시아주의와 탈(脫)아시아주의가 교차하면서 역사가 진행됐다. 
'대동아공영권'을 부르짖다가 2차대전에서 패하자 미국 주도의 서방 세계에 기꺼이 편입된 나라가 일본이다.

아베 총리가 이번 방미를 통해 미국에 노골적 구애(求愛)를 던지고 아시아 국가들은 무시함으로써 일본은 아시아를 벗어나 
'태평양 국가'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일본의 이런 행보는 물론 숙적(宿敵) 중국의 강력한 부상에 대한 경계심 때문이다. 
태평양을 잇는 미국 주도의 대(對)중국 봉쇄망 참가와 태평양 국가들과의 경제적 유대 강화에 국가의 운명을 걸고 있는 것이다.

탈(脫)아시아 행보를 가속화하고 있는 '아베의 일본'이 동북아시아의 인접 국가들을 배려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중국 중심의 신(新)조공 체제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한국에 대해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사과나 사죄할 생각이 별로 없는 상대방에게 이를 계속 요구하는 것은 피차 괴로운 일이다. 
이제는 '동양 3국'이 아니라 '태평양 국가'로 탈바꿈하는 일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보다 냉철한 대일 관계를 구상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