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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Culture] 過去가 된 조선..현판은 알고 있다

바람아님 2015. 5. 26. 09:43

매일경제 2015-5-23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 열흘 뒤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면서 아버지 사당이던 수은묘를 크게 확대하고 이름을 경모궁(景慕宮)으로 바꿨다. 정조는 경모궁에 관한 기록과 의식을 정리한 경모궁의궤에 "피눈물로 삼가 인(引)을 쓴다"고 적었다.

 

경모궁은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뒤편에 있었다. 정조는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의 넋을 기리기 위해 창경궁 동문을 통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이곳을 참배했다. 25년간 재위하는 동안 정조가 경모궁을 다녀간 것은 무려 336회나 된다. 대왕이 부친을 매월 알현하러 가는 길이라고 해서 동문의 명칭도 월근문(月覲門)으로 붙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인 1924년 경모궁 일대에 경성제국대 의학부가 들어서면서 본모습을 잃었고 한국전쟁 때에는 남은 건물마저 불타버렸다. 현재는 정조가 직접 쓴 경모궁 현판만이 전해 온다.

 

한양도성 4대문 중 하나인 돈의문(서대문) 현판.


한양도성 4대문 중 하나인 돈의문(서대문) 현판.

 

국립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이 경모궁 현판을 포함해 총 775개의 조선시대 궁중현판이 보관돼 있다. 궁중현판은 전각, 궁문, 누각 등 각종 궁중 건축물에 달았던 액자다. 이들 건물은 대부분 현존하지 않아 현판이 매우 귀한 실정이다. 무엇보다 현판은 해당 건축물이 최초 건립 또는 재건될 당시 제작됐던 것들이어서 더욱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도대체 현판은 어떤 경로를 거쳐 한데 모이게 됐을까. 현판의 구체적인 현황과 각각의 글씨에 담긴 뜻 등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높아진다. 국립고궁박물관이 자체 소장한 현판의 전모를 조사하는 '궁중현판 학술조사연구(연구책임 김언종 고려대 교수)'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는 올해부터 내년까지 2년간 실시된다.

 

건물명을 적은 액자를 모두 현판(懸板)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현판의 종류에는 현판, 편액(扁額), 주련(柱聯) 등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영조가 노년기에 쓴 반송정(盤松亭) 현판. 예술성은 높지않다는 평가다.


영조가 노년기에 쓴 반송정(盤松亭) 현판. 예술성은 높지않다는 평가다.

 

현판은 널판지나 종이·비단에 시문, 유명한 글귀, 수교(受敎·임금의 교명), 수칙(守則) 등의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건물에 거는 액자를 통칭하는 명칭이며, 이 가운데 특별히 건물 정면의 문과 처마 사이에 건 건물의 이름을 적은 것을 '편액'이라고 일컫는다. 주련은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를 말한다.

 

궁중현판은 애초 창덕궁 행각에 놓여져 있었는데 1992년 한 차례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으로 이관됐다가 2005년 다시 고궁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왜 현판이 별도의 장소가 아닌 창덕궁 행각에 방치됐는지는 현재까지 파악되지 않는다.

고궁박물관 측은 "조선시대에는 화재 등으로 건물이 없어지더라도 건물의 얼굴인 현판은 꼭 보관했다"면서 "비는 피할 수 있어 창덕궁 행각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당초엔 받침대 위에 그냥 현판들을 올려놓았고 아무나 쉽게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서대문'으로도 불리는 돈의문(敦義門)은 도성 4대문 중 하나로 중요 대문인데도 1915년 일제에 의해 철거된 뒤 지금까지 제 위치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 의주 국도의 관문으로 경희궁 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만 될 뿐이다. 이 돈의문의 편액은 영조 25년(1749) 조윤덕의 작품이다.

 

중종 33년(1538) 제작된 영은문(迎恩門) 편액은 고궁박물관 궁중현판 가운데서도 연도가 앞서 있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처소인 모화관 정문에 붙였던 것이다. 모화관은 돈의문 서북쪽, 현재 독립문 자리에 있었다. 고종 33년(1896)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세우고 이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해 자주독립을 표방했다.

 

1928년 헐렸다가 1992년 복원된 혜화문(惠化門) 현판의 원형도 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양주·포천 방면으로 연결되는 출입구로 이 문을 통해 여진(女眞)의 사신이 드나들기도 했다. 지금의 혜화문 현판 글씨는 원형을 복원한 게 아니라 27대 이원종 서울시장(재임 1993년 3월 8일~1994년 10월 21일)이 쓴 것이다.

 

경희궁 편액도 발견된다. 경희궁은 1829년(순조 29) 불타 1831년에 중건됐으며 그나마도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 해체됐다. 따라서 화재 이전 건물과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실정이어서 현판의 희귀성이 높다. 어필이라는 글자가 함께 새겨져 있는 양덕당(養德堂) 현판은 사도세자의 친모 영빈 이씨 거처에 사용했다. 글자는 영조와 정조 중 한 명이 썼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강점기 해체되기 전 혜화문에 걸렸던 글씨(위). 1990년 중반 복원하면서 당시 이원종 서울시장이 직접 쓴 현재의 현판(아래).


일제강점기 해체되기 전 혜화문에 걸렸던 글씨(위). 1990년 중반 복원하면서 당시 이원종 서울시장이 직접 쓴 현재의 현판(아래).

 

현판은 임금의 글자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선조와 숙종은 명필로 유명했다. 창덕궁 영화당(暎花堂)에 걸려 있었던 청량동해수 간취천심수(請量東海水 看取淺深愁·동해 바다의 깊이를 잴 수 있지만, 내 마음의 근심은 가늠하기 어렵다)가 선조 작품이다. 경희궁 용비루(龍飛樓)의 교월여촉(皎月如燭·밝은 달이 촛불처럼 밝다), 창덕궁 영화당의 가애죽림(可愛竹林·사랑함직한 대숲)은 숙종의 글씨다.

 

정조 때 왕실 도서관 역할을 하던 규장각(奎章閣)은 숙종 20년(1694) 왕실계보를 편집하던 종시부 안에 처음 지어졌다. 이때는 도서관이 아니라 왕의 시문과 친필, 고명(임금 유언), 선보(임금과 왕족의 일기장) 등을 관리하던 장소였다. 최초의 규장각 현판은 숙종의 친필이며 이 현판 역시 고궁박물관에 수장돼 있다.

 

서울시 옥수동 한강변에 있던 만회당(萬懷堂)은 영조의 친필이다. 영조 48년(1772) 왕이 직접 옥수동 두모포에 지어진 정자에 거동했다가 감회에 젖어 서서당(西書堂)이던 정자 이름을 만회당으로 바꿔 걸게 했다. 고궁박물관 현판 가운데 영조의 글씨는 이를 포함해 80여 점에 달한다. 의욕이 넘치는 반면 예술성은 떨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궁박물관 측은 "영조는 특히 말년에 많은 현판 글을 적었는데 수준 이하의 것이 많아 신하들의 지적을 받았으며 더러는 신하들이 글자를 고친 뒤 현판을 제작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창덕궁 수방재(漱芳齋) 편액은 고종의 친필이다. 어필이라는 글자와 함께 주연지보(珠淵之寶)라는 낙관이 있다. 주연은 고종의 호다.

 

당대 학자들도 이 대열에 다수 참가했다. 어진봉안각(御眞奉安閣)은 정조대의 명재상 채제공(1720~1799)의 글씨다. 정조 16년(1792) 여름 좌의정 채제공이 왕명을 받아 적었다. 어진봉안각은 '임금의 초상을 모시는 집'이라는 뜻으로 창덕궁 선원전(璿源殿) 안에 있던 어진봉안각에 걸었던 편액이다. 창덕궁 선원전에는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초상이 봉안됐으나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옮겨졌다가 1954년 12월 발생한 화재로 대부분 소실됐다.

 

특이하게도 청나라 황제 어필도 전해진다. 동번승미(東藩繩美)는 청나라 최전성기인 6대 건륭제(乾隆帝·재위 1735∼1795), 예교수번(禮敎綏藩)은 7대 가경제(嘉慶帝·재위 1796~1820)가 직접 써서 조선에 선물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들 현판이 어느 건물에 있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서준 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원래 건물이 대부분 사라지고 없는데도 800점에 달하는 현판이 지금까지 큰 훼손 없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 놀랍기만 하다"면서 "그렇지만 이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늦었지만 현판의 정확한 뜻이나 출처를 연구 중이며 이어 당초 건물 용도가 무엇인지, 글자체와 글자색·바탕색, 액자 형식의 변화 등 다양한 조사연구를 지속적으로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배한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