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입력 2015.05.28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지난해부터 영훈당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하던 과정에서 석탄 창고와 등에 사용된 탄소봉, 유리 절연체 등 유물을 발굴해 이 같은 오류를 바로잡았다고 27일 발표했다.
전기등소는 고종(1852~1919)이 개화 의지를 국내외에 알리려 1887년 1월 완공했다. 미국의 신문물을 시찰하고 귀국한 보빙사(報聘使)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와 손잡고 세웠다. 고종황제와 명성황후가 머물던 건천궁 주변 뜰과 실내를 밝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용이 많이 든 데 비해 생산량은 적은데다 발전 시스템이 불안정해 ‘건달불’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제1전기등소는 1894년 제2전기등소가 세워지면서 해체됐다.
27일 오전, 전기등소 터 발굴 현장에서 설명회를 연 지병목 국립문화재연구소 고고연구실장은 “불과 120여 년 전 기록인데도 잘못 알려진 사례로써 큰 교훈을 준 발굴”이라고 설명했다. 민병근 전기박물관 학예사는 “미국이나 일본에 그리 뒤처지지 않은 상당히 이른 시기에 전기를 받아들인 대한제국 고종황제의 앞선 생각과 왕권 강화에 대한 꿈을 읽을 수 있는 상징물”이라고 전기등소를 평가했다. 백열등보다 전 단계에 사용되던 아크등(arc lamp)을 썼다는 사실도 한국 전기도입사 초창기 서술을 위한 큰 수확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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