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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국가 인재로 키웠더니..프랑스 명문대 '위약금' 내라

바람아님 2015. 6. 4. 07:52

SBS 2015-5-29

 

7월 14일은 프랑스 혁명기념일이다. 이날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는 대규모 군사행진이 펼쳐진다. 방송사가 생중계할 정도로 프랑스 국경일 중 가장 큰 행사이다. 이 행진에 군인 뿐 아니라 대학생인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 학생들도 참여한다. 그것도 행진의 선두에 선다.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은 사관학교 생도들보다 앞서 행진하는 영예를 누린다.

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들에게 특권이 주어지는 이유는 이 학교 학생들이 프랑스에서 가장 공부 잘하고 똑똑하기 때문이다. 에콜 폴리테크니크는 프랑스 엘리트들을 배출하는 그랑 제콜(Grandes Ecoles) 가운데 하나이다. 이름에서 유추해 볼 수 있듯이 이공계열 대학이다. 이공계열에서 프랑스 최고 학교이며, 세계 대학 평가에서도 늘 상위권에 든다. 학교는 1794년 설립됐고, 1804년 나폴레옹이 군사학교로 변경했다. 국가, 과학, 영광을 위한다는 모토를 내걸었다. 군사학교와 공대를 합쳐 놓은 듯 하며, 기술관료를 양성하는 목적이 있다. 지금도 국방부 소속의 교육기관이다.

 

이 학교를 졸업하면 프랑스 공직사회와 기업체의 핵심 보직으로 가는 지름길이 열린다. 급여도 일반 대학 졸업자보다 높다. 미래가 보장된 학교이니 입학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하고, 프랑스에서는 극히 드문 재수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랑제콜에 입학한 학생이라면 국가의 인재로 인정받는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특권을 인정한다. 혁명으로 자유와 평등을 쟁취한 나라에서 이런 발상이 가능할까 싶지만, 프랑스인들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특권을 주는 대신 그들에게 국가와 보통 사람의 미래를 책임져 보라고 맡기는 것이다. 과거 왕과 귀족의 역할을 학력이 대신하는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폴리테크니크 학생을 국가 엘리트로 키우기 위해 학비와 기숙사비는 물론 생활비로 매달 500유로(60만 원)를 제공한다. 학업 중에 공무원 대접을 해주는 셈이다. 일반 대학생에게는 없는 특전이다. 그런데, 막대한 비용을 들여 양성한 졸업생들이 국가에 대한 봉사보다 기업 취업을 선택하면서 사회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프랑스 회계원과 의회가 조사했더니 졸업생의 13%만이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를 위한 일이란 공공 서비스 영역에서 근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졸업생의 23%는 졸업하자 마자 외국 기업으로 달려갔다. 전체적으로 55%가 민간기업을 선택한 것으로 조사됐다. 같은 해 졸업생인데 누구는 지방 공기업에서 일하고, 누구는 미국계 은행에서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것이다. 2천년, 이 학교 졸업생이 졸업 후 공공부문에서 일정 기간 의무적으로 일해야 한다는 규정을 손질해 민간 부문 취업을 자율화한 것이 화근이 됐다. 규제 완화가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폴리테크니크의 상황을 2천 년 이전으로 되돌려야 한다며 관련 법령을 개정해 최근 관보에 게재했다. 핵심 내용은 이 학교 졸업생은 졸업 이후 10년 동안 국가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9월 신입생부터 졸업 후 10년간 국가와 관련된 근무를 하지 않을 경우 학생 때 지원받은 학비 등을 감안해 '위약금'을 물리기로 했다. 위약금은 4만 5천 유로(5,444만 원) 안팎이다.

국가와 시민이 부여한 특권을 개인적 영달에 이용하도록 방치한 정부를 비난하는 여론이 많다. 엘리트의 역할에 대한 의문도 커지고 있다. 프랑스는 몇 년째 경제난을 겪고 있고, 특히 청년 실업이 심각하다. 경제 규모는 지난해 영국에 추월당해 유럽에서 3위로 내려 앉았다. 기존 정당도 새로운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인재에게 특권을 주는 대신 평민의 미래를 보장해보라고 맡겨왔던 프랑스식 엘리트주의가 잘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은 명확해 보인다.

 


서경채 기자seokc@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