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5.06.04 길해연 배우)
- 길해연 배우
밤샘 촬영으로 두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고 잇몸은 부풀어올라 보톡스 방금 맞고 나온 사람처럼
볼따구니가 터져 나갈 것 같다.
생일날 꼭두새벽에 짐 싸들고 부산 강의를 가야 하는 것부터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는데
기차역까지 짐 실어다 주기로 한 동생이 감감무소식이라 전화했더니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저녁 7시에 간다는 거 아니었어?"라는 것이다.
시시비비를 가릴 시간도 아까워 짐 보따리를 둘러메고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기름을 확 부어 주신다.
시시비비를 가릴 시간도 아까워 짐 보따리를 둘러메고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기름을 확 부어 주신다.
"얘, 큰이모 떡 보내드려야 하는데…."
길게 나열될 주문 사항을 "이따 전화 드릴게요"란 말로 일단 잘라내고 뛰쳐나온다.
택시는 안 잡히고 이리저리 뛰다 결국 기차를 놓쳤다.
학생들에게 전화해 시간을 변경하고 예약 취소 자리를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까지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내 온몸은 화에 휩싸여 몇 번이나 지옥 불길에 던져진다.
안에서 열이 올라 얼굴이 찢어질 것만 같아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니, 아하 이럴 수가.
안에서 열이 올라 얼굴이 찢어질 것만 같아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니, 아하 이럴 수가.
그 안엔 나는 없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괴물 하나가 들어있는 게 아닌가.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사라진 나를 되찾아 보려 기억을 더듬어 본다.
평상시 나는 화를 잘 안 내는 사람 축에 들었는데…. 오늘 일들이 그렇게 화가 날 일들이었나?
답은 의외로 쉬웠다.
답은 의외로 쉬웠다.
나는 지쳐 있었다.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아닌 척하느라 병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목마르고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싸울 거리를 찾아 헤맨다더니 내가 그 꼴이었다.
이 화란 녀석, 신묘한 재주가 있어 소중한 가족들을 순식간에 내 목에 빨대를 꽂고 피를 빨아대는 흡혈귀로 둔갑시킨다.
"어이, 나 돈 좀 주라." 따라오며 욕을 퍼붓는다.
나는 지옥의 불구덩이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세네카의 말을 주문처럼 중얼거려 본다.
"어쩌자고 우리는 인생을 남들에게 화나 퍼부으며 낭비하고 있는가.
고결한 즐거움을 누리기에도 짧은 인생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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