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2015-6-15
야당의 박혜자 의원은 되물었다. “국가가 뚫린 겁니까? 삼성이 아니고.”(자칫하면 국가와 병원이 아니고 국가와 삼성의 책임공방으로 들릴 소지도 있겠다.)
다음날이 궁금했다. 예상대로 병원은 사과문을 돌렸다. “환자의 곁을 지키고 끝까지 치료하는 것은 병원과 의료인의 기본적인 책임이다. 저희 병원 실무자의 부적절한 발언은 저희 병원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는 전혀 아니었다.”
종강시간에 물었다. “살면서 지켜야 할 것들엔 뭐가 있을까요?” 1학년 ‘대학생활과 진로’ 과목이었다. 만약 ‘의사생활과 진료’였다면 ‘환자의 곁’이라는 답이 먼저 나왔을 거다. 문화학도들은 달랐다. 약속이요, 시간이요, 의리요, 원칙이요, 양심이요, 비밀이요. 이 밖에도 수두룩하다. 조국(지구·독도 포함), 생명, 건강, 가정(가족), 매너(예의), 질서(차선), 자존심, 민주주의, 인류, 인권, 자유, 정의, 평화, 신념(신앙), 골대(골키퍼 출신?). 마지막에 순결까지 나온 후에야 리스트열차가 멈췄다. 국어교사 출신으로 나도 하나 추가했다. “우리말도 지켜야죠.” 안 나온 게 하나둘인가. 권위와 품위, 명예와 재산(밥그릇과 기득권), 성역과 유산, 그리고 매뉴얼. 젊어서 아직은 안 와 닿을 거다. “머잖아 임종도 지켜야 할 때가 올 거야.”
지켜야 할 것들은 수시로 충돌한다. 재산을 지키러 불길에 뛰어들려는 사람을 소방관은 막는다. 생명을 지키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순서를 안 지키면 불행해진다. 사소한 걸 지키려고 중요한 걸 지키지 않는 경우가 좀 많은가. 자리를 지키려고 침묵을 지킬 때 기분이 어떠하던가.
내 얘기는 별책부록이다. “한동안 난 가방 지키는 애였어. 친구들이 축구할 때 거기 못 끼었거든. 돌아보니 각자 역할을 지키는 게 최고더라.” 그리고 기본을 얘기했다. “기본을 못 지키면 구멍이 뚫려. 쥐구멍이 소구멍 되는 건 시간문제거든.” 아이들도 응답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잖아요.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고.” 교실에 웃음이 번진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수업은 소란해도 행복하다.
주철환 아주대 교수·문화콘텐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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