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2015.08.08
[월간중앙] 1398년 8월 26일 밤에 일어난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태조 이성계는 권력을 잃고 상왕으로 밀려났다. 정종 1년(1399) 2월 26일 개경으로 재천도가 결정되자 한양 시민들은 크게 기뻐하며 서둘러 이사했다. 이성계의 위력에 눌려 억지로 옮겨온 그들에게 한양은 죽음의 땅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3월 7일 이성계도 경복궁을 나와 개경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61세이던 1395년 12월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한 지 4년 만이었다. 개경으로 되돌아갈 때 이성계는 이미 65세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였다. 가는 길에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을 지나게 되자 차마 그대로 가지 못하고 능에 올라 이곳저곳 둘러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성계에게 재천도는 상실감에 더해 수치심을 불러왔다.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는 신생왕조의 개국시조로서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4년 세월이 흐른 지금 이성계는 절대권력을 잃고 폭 삭은 노인이 돼 끌려가다시피 개경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금의환향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런 꼴을 개경 시민들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개경 입성 직전 이성계는 “내가 한양에 천도했다가 처자식을 잃고 오늘 환도하니 진실로 개경 사람들에게 수치스럽다. 그러므로 내가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어두울 때 해서 개경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해라”고 명령했다. 3월 9일 새벽 이성계는 숨어들 듯 개경으로 들어갔다. 이런 면에서 당시의 이성계는 과거의 위풍당당하던 개국시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상실감과 수치심으로 몸부림치는 가여운 노인일 뿐이었다.
이성계의 개경 거처는 덕수궁이었는데 그 주변에 신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언제 창건됐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시에는 제법 큰 절이었다. 정종 2년(1399) 8월 중순 이성계는 몰래 덕수궁을 빠져 나와 신암사로 갔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비명횡사한 방석·방번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자 이방원에게 발각돼 다시 덕수궁으로 끌려왔다. 이방원은 미안한 마음에 크게 잔치를 열었다.
술에 취하자 이성계는 “밝은 달은 주렴에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구나”라고 읊었다. 한술 더 떠 “산하는 의구한데 사람은 어디 있느뇨?”라고 한 뒤 “나의 이 시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했다. 이성계는 고독하고 슬펐던 것이다. 그 고독과 슬픔은 이방원 때문이었고 그래서 이방원이 있는 개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10월 11일 생일잔치를 치른 지 나흘째인 15일 한밤중에 이성계는 탈출하듯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서 불공을 드린 이성계는 오대산으로 갔다. 그곳에 머물던 11월 11일 개경에서는 마침내 세자 이방원이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양위하라고도 할 수 없고 양위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미 양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이런 언급 속에서는 무력감과 체념이 감지될 뿐이었다.
‘원수’와 ‘아들’ 사이에서 번민하는 상왕
이방원이 왕, 즉 태종이 된 후 이성계는 개경이 더더욱 싫어졌다. 이방원에 대한 미움도 같이 커졌다. 이성계는 개경을 떠나 다른 곳에 살 곳을 마련하려고 했다. 태종 1년(1401) 윤 3월 1일 한양의 정릉에 행차했던 이성계는 금강산을 거쳐 안변·함흥으로 가버렸다. 안변은 이성계의 처가가 있던 곳이고 함흥은 어려서 자란 고향으로서 명실상부 이성계의 아성(牙城)이었다. 이성계는 안변과 함흥에 궁궐을 새로 짓고 눌러 살 작정이었지만 성석린에게 설득돼 다시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당시 이성계가 안변·함흥 지역에 오래도록 머물자 태종은 문안을 명분으로 사람을 자주 보냈다고 한다. 명분은 문안이지만 실제는 동북면의 아성을 이용해 혹 무슨 일을 벌이지나 않을지 정탐하기 위해서였다. 이성계는 문안하겠다고 사람이 올 때마다 활에다 살을 매기고 쏠 듯이 위협하며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태종의 불안감은 말할 수 없이 커져갔다.
그때 이성계의 옛 친구였던 성석린이 자청해 함흥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마치 지나가는 길손처럼 가장한 성석린은 함흥으로 들어갔다. 이성계가 머물던 부근에 도착한 성석린은 밤에 불을 피우고 밥짓는 시늉을 했다. 이에 이성계는 내시를 보내 누군지 알아보게 했는데 그때 성석린은 “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이성계는 성석린이 정말로 우연히 지나는 길이라 생각하고 불러서 만나봤다. 그때 성석린이 개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하자 이성계는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성석린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먼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맹서했다. 그 맹서에 이성계는 성석린을 믿었고 마침내 설득돼 개경으로 되돌아오게 됐으며 성석린의 자손들은 그의 거짓 맹서대로 장님이 됐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갈등으로 방황했다.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태종은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다. 태종은 자신의 와병을 틈타 사랑하는 아들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아갔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 그리고 아들과 권력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은 곧바로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연결됐다. 그런 미움과 복수심을 이기지 못할 때마다 이성계는 태종과 개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종은 바로 자신이 건국한 조선왕조의 왕이기도 하고 또 아들이기도 했으며, 개경은 조선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태종과 개경을 버리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다.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이성계는 태종과 개경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반면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종과 개경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감정과 이성 사이를 방황하며 상왕 이성계는 개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고 또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곤 했다.
복수 결심하고 고향 동북면으로 가는데
안변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불당을 짓고 부처에게 기도하기도 하는 등 노력했다. 하지만 방황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상왕 이성계는 다시 개경을 떠나 소요산으로 갔다. 그곳에 유명한 스님이 있어서 별전(別殿)을 짓고 눌러 앉으려고 했다.
이에 태종이 직접 소요산까지 찾아가서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대들의 뜻은 내가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라고 대답하고 공중에다 큰소리로 “나도 이미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고 외쳤다.
방황하던 이성계는 아예 속세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나도 이미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는 외침이 그런 마음이었다. 소요산의 별전에 머물던 이성계는 태종 2년(1402) 6월 9일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로 행차했다. 소요산에 머문 지 거의 7개월 만의 일이었다.
회암사에서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계(戒)를 받고 보살이 됐다. 머리만 깎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출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태종이 문안한다는 명분으로 회암사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이성계는 회암사에 4개월가량 머물렀지만 방황에서 헤어나지는 못했다. 회암사로 갈 때는 출가하려던 마음이었지만 결국 태종의 방해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이성계의 방황은 마침내 미움과 복수의 감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태종 2년(1402) 10월 27일 이성계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명나라 칙사 온전(溫全)을 마중한다는 핑계로 회암사를 떠나 연천 방향으로 행차했다. 하지만 속셈은 고향 동북면으로 갈 생각이었었다. 이번에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서 군대를 일으켜 태종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수상하게 생각한 태종은 경호를 명분으로 감시 병력들을 딸려서 보냈다. 하지만 이미 복수를 결심한 이성계는 그 감시 병력들까지 협박해 동북면으로 데리고 갔다. 감시 병력들이 “태상왕께서 칙사를 마중한다고 하셔서 주상전하께서 저희들을 보내 시위하게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깊이 먼 지방까지 들어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라며 가려고 하지 않자 이성계는 “너희들은 모두 내가 기른 군사들인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느냐?”라며 눈물을 흘렸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아들과 군대의 배반이라 생각하며 복수심이 극에 달한 터라 이렇게 쉽사리 눈물을 보일 정도로 감정이 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시 병력들은 마지못해 동북면으로 동행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11월 4일 김화를 거쳐 11월 8일 철령을 넘고 9일에는 함흥으로 향했다. 11월 4일 김화를 출발하기에 앞서 측근 환관 함승복과 배상충을 미리 동북면으로 보내 군대를 모으게 했다. 11월 5일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영흥판관 김권(金?) 등 동북면의 실력자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조사의는 바로 신덕왕후 강씨의 친족으로서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해 상왕 이성계 못지않게 분개하고 있었다.
그런 조사의였으므로 함승복과 배상충의 권유를 받자마자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다. 조사의가 군대를 일으킨 11월 5일 이후 동북면 지역은 사실상 이성계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11월 8일 상왕 이성계가 철령을 넘을 때는 자신의 왕국으로 입성한 셈이었다.
분노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이른바 ‘조사의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의 내막은 이성계가 아들 태종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북면의 군대를 일으킨 것이었다. 태종은 그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성계와 태종의 군대는 동북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초반 전투는 이성계 측의 군대가 승기를 잡아나갔지만 일진일퇴의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는 점점 확대됐다. 이성계 측에는 여진족들이 가세했고 태종 측에도 후방 지원군들이 속속 가세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국이 전쟁터가 될 판이었다.
이성계가 조사의 등을 움직여 군대를 일으킨 것은 궁극적으로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의 감정에서였다. 그런 면에서 이성계가 냉정하게 사후대책을 세웠을 리가 없었다. 만약 복수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 스스로도 그런 문제를 모르지 않았다.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68세나 된 그가 다시 왕위에 올라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도 없었다. 감정적으로는 복수를 하고 싶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다.
결국 이성계가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설득해 복수심만 누그러뜨린다면 이성계의 군대는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태종은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함흥으로 보냈다. 그러나 함흥차사는 가기만 할 뿐 소식이 없었다.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가고난 후 소식이 없는 사람들, 함흥차사가 그들이었다. 마침내 태종은 이성계가 가장 존경하고 신임하는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이성계를 만난 무학대사는 “방원은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허나 전하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미 다 죽고 다만 이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 사람마저 없애버린다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핏줄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 원컨대 세 번 생각하소서”라고 설득했다.
실록에 따르면 11월 28일 연산부사 우박(禹博)이 역마를 타고 개경에 와서 상왕 이성계의 귀경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연산은 지금의 평안도 영변지역인데 이성계는 함흥에서 맹산을 거쳐 평안도 영변지역까지 갔던 것이다. 물론 군대를 모으느라 그렇게 했다. 이성계는 11월 9일쯤 함흥에 도착했는데 그로부터 9일 후인 18일에 맹산으로 갔다가 다시 10일 후인 28일쯤 영변에서 귀경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미움과 복수심, 운명론으로 극복하다
조사의도 이성계를 따라 군대를 이동시켰다. 11월 24일자의 <태종실록>에 의하면 그때 조사의의 군대는 맹산과 영변의 중간쯤인 덕천에 주둔해 있었다. 아마도 조사의의 군대는 11월 18일 이성계와 함께 함흥에서 맹산으로 갔다가 다시 이성계와 함께 영변 쪽으로 이동 중인 24일 덕천에 주둔했을 것이다. 그러던 조사의의 군대는 바로 3일 후인 27일 안주에서 청천강을 건너다가 궤멸하고 말았다.
앞뒤 정황을 보면 상왕 이성계는 26일쯤 영변에 도착한 후 무학대사에게 설득돼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것은 곧 자신이 선동해 일으킨 조사의 등의 군대를 버렸다는 의미다. 그렇게 버림받은 조사의의 군대는 27일 자멸했던 것이다.
복수하겠다고 군대까지 일으켰던 이성계가 그토록 허무하게 복수를 접은 것은 그것이 감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의 논리 정연한 설득에 복수심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이었다. “만약 이 사람마저 없애버린다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핏줄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무학대사의 말은 냉정히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에 의해 이성계는 감정을 누르고 이성을 살려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성은 다시 감정에 휘둘리고 말았다. 영변에서 평양을 거쳐 개경을 향해 가면서 감정이 솟아났던 것이다. 게다가 12월 8일 태종을 만나게 되자 그 감정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됐다. 야사에서는 상왕 이성계가 태종을 만나면서 얼마나 감정적으로 행동했는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개경의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베풀었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께서 성난 것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을 받치는 기둥을 큰 나무로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허락하고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차일 기둥을 만들었다. 태종이 태조를 만날 때 면류관에 국왕의 복장을 하고 가서 뵈었다. 태조가 태종을 바라보다가 노한 얼굴빛이 되면서 갖고 있던 활을 힘껏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에 의지해 몸을 숨기자 화살은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말하기를, ‘천명이로다’라고 했다. 이어서 옥새를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갖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고 했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잔치를 시작하고 술잔을 받들어 올리려 하는데 하륜 등이 몰래 태종에게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서 잔에다 술을 따른 후 잔을 올리실 때 술잔을 직접 올리시지 마시고 마땅히 환관에게 줘서 올리소서’라고 했다. 태종이 그 말대로 해 환관이 술잔을 올렸다. 태조가 받아서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안에서 철퇴를 찾아내 옆에 놓으면서 말하기를 ‘모두가 천명이로다’라고 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종 2년(1402) 12월 8일 이성계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개경을 떠난 지 만 1년 만이었다. 그 1년 동안 소요산·회암사·함흥·영변을 거치면서 온갖 곡절을 겪었다. 그 곡절들은 모두가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일어난 방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2월 8일 이후로 이성계는 더 이상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지는 않았다. 확실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천명이로다”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운명에 대한 순응이었다.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을 이성이 아닌 운명론으로 극복한 것이었다.
비극적 말년은 국가권력의 오용(誤用)에서 비롯돼
사실 이성계는 운명론자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조선을 창업하기 이전 100여 차례 이상 전투를 치르면서 이성계는 삶과 죽음, 그리고 승리와 패배가 사람의 이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졌다.
전쟁은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꼭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우세하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성에 입각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졌다고 생각한 전투에서 이기거나 죽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살아난 것은 이성의 힘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확실한 방법은 천명 즉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성계는 태종이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왕이 된 현실을 ‘배신’과 ‘불효’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는 절대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배신’과 ‘불효’로 만들어진 현실은 처벌되고 바뀌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는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태종을 처벌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서 군대를 일으일으키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막상 군대를 일으켰지만 뒷일을 감당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심도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성계 자신이 왕년의 이성계가 아니었다. 왕년에 자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은 더 이상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68세의 노인에게 희망을 두지 않았다. 자칭타칭 판단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말리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태종과 만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 일거에 처벌하려고도 했지만,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도 말리고 꼭 될 것 같은 기회도 무산된 것은 결국 하늘이 시켰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운명이었다. 결국 하늘은 방석이 아니라 방원에게 왕위를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인정하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도정치와 패도정치의 차이를 논하는 <대학연의> ‘왕도패술지이(王道覇術之異)’에서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덕과 힘에서 찾는다. 힘을 위주로 하는 정치가 패도정치라면 덕을 위주로 하는 정치가 왕도다. 왕도정치의 핵심은 ‘보민(保民)’이고, 보민의 핵심은 백성을 아끼고 지켜주며 키워서 기르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백성을 아끼고 지켜주며 키워서 기를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이란 개인적인 미움·분노·사랑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아끼고 지켜주며 키워서 기르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데 있다. 조선의 건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비극적인 말년은 이런 이치를 모른 데서 온 대가라 할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가 여덟 아들 가운데 막내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반발해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유동근 분)이 측근인 조영무(오른쪽, 장항선 분), 이숙번(왼쪽, 선동혁 분)과 함께 입궐하고 있다.
3월 7일 이성계도 경복궁을 나와 개경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61세이던 1395년 12월 개경을 버리고 한양으로 천도한 지 4년 만이었다. 개경으로 되돌아갈 때 이성계는 이미 65세로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나이였다. 가는 길에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을 지나게 되자 차마 그대로 가지 못하고 능에 올라 이곳저곳 둘러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이성계에게 재천도는 상실감에 더해 수치심을 불러왔다. 이성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할 때는 신생왕조의 개국시조로서 기세가 등등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4년 세월이 흐른 지금 이성계는 절대권력을 잃고 폭 삭은 노인이 돼 끌려가다시피 개경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금의환향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이런 꼴을 개경 시민들에게 보여야 하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다.
개경 입성 직전 이성계는 “내가 한양에 천도했다가 처자식을 잃고 오늘 환도하니 진실로 개경 사람들에게 수치스럽다. 그러므로 내가 출입하는 것은 반드시 어두울 때 해서 개경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해라”고 명령했다. 3월 9일 새벽 이성계는 숨어들 듯 개경으로 들어갔다. 이런 면에서 당시의 이성계는 과거의 위풍당당하던 개국시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상실감과 수치심으로 몸부림치는 가여운 노인일 뿐이었다.
이성계의 개경 거처는 덕수궁이었는데 그 주변에 신암사라는 절이 있었다. 언제 창건됐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시에는 제법 큰 절이었다. 정종 2년(1399) 8월 중순 이성계는 몰래 덕수궁을 빠져 나와 신암사로 갔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비명횡사한 방석·방번 등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자 이방원에게 발각돼 다시 덕수궁으로 끌려왔다. 이방원은 미안한 마음에 크게 잔치를 열었다.
술에 취하자 이성계는 “밝은 달은 주렴에 가득한데 나는 홀로 서 있구나”라고 읊었다. 한술 더 떠 “산하는 의구한데 사람은 어디 있느뇨?”라고 한 뒤 “나의 이 시 구절에는 깊은 뜻이 있다”고 했다. 이성계는 고독하고 슬펐던 것이다. 그 고독과 슬픔은 이방원 때문이었고 그래서 이방원이 있는 개경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10월 11일 생일잔치를 치른 지 나흘째인 15일 한밤중에 이성계는 탈출하듯 개경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서 불공을 드린 이성계는 오대산으로 갔다. 그곳에 머물던 11월 11일 개경에서는 마침내 세자 이방원이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이 소식을 들은 이성계는 “양위하라고도 할 수 없고 양위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미 양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했다 한다. 이런 언급 속에서는 무력감과 체념이 감지될 뿐이었다.
‘원수’와 ‘아들’ 사이에서 번민하는 상왕
이성계의 둘째 부인 신덕왕후 강씨가 묻혀 있는 정릉(貞陵). 능은 원래 서울 중구 정동(주한영국대사관 자리로 추정됨)에 조성됐으나 이방원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당시 이성계가 안변·함흥 지역에 오래도록 머물자 태종은 문안을 명분으로 사람을 자주 보냈다고 한다. 명분은 문안이지만 실제는 동북면의 아성을 이용해 혹 무슨 일을 벌이지나 않을지 정탐하기 위해서였다. 이성계는 문안하겠다고 사람이 올 때마다 활에다 살을 매기고 쏠 듯이 위협하며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태종의 불안감은 말할 수 없이 커져갔다.
그때 이성계의 옛 친구였던 성석린이 자청해 함흥으로 가겠다고 나섰다. 마치 지나가는 길손처럼 가장한 성석린은 함흥으로 들어갔다. 이성계가 머물던 부근에 도착한 성석린은 밤에 불을 피우고 밥짓는 시늉을 했다. 이에 이성계는 내시를 보내 누군지 알아보게 했는데 그때 성석린은 “일이 있어 지나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고 한다”고 거짓으로 대답했다.
이성계는 성석린이 정말로 우연히 지나는 길이라 생각하고 불러서 만나봤다. 그때 성석린이 개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하자 이성계는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해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성석린은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먼 장님이 될 것입니다”라고 맹서했다. 그 맹서에 이성계는 성석린을 믿었고 마침내 설득돼 개경으로 되돌아오게 됐으며 성석린의 자손들은 그의 거짓 맹서대로 장님이 됐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자신도 어쩔 수 없는 갈등으로 방황했다. 감정적으로 생각하면 태종은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다. 태종은 자신의 와병을 틈타 사랑하는 아들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권력을 빼앗아갔다. 뒤통수를 맞았다는 배신감 그리고 아들과 권력을 빼앗겼다는 상실감은 곧바로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으로 연결됐다. 그런 미움과 복수심을 이기지 못할 때마다 이성계는 태종과 개경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종은 바로 자신이 건국한 조선왕조의 왕이기도 하고 또 아들이기도 했으며, 개경은 조선왕조의 수도이기도 했다. 태종과 개경을 버리는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자신의 삶을 모두 버리는 것이었다. 감정이 복받칠 때마다 이성계는 태종과 개경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반면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태종과 개경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었다. 감정과 이성 사이를 방황하며 상왕 이성계는 개경에 돌아왔다가 다시 떠나고 또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곤 했다.
복수 결심하고 고향 동북면으로 가는데
정몽주가 이방원의 수하(手下)인 조영규에게 참살된 선죽교.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와 이방원의 사이는 금이 가기 시작했다.
안변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이성계는 불당을 짓고 부처에게 기도하기도 하는 등 노력했다. 하지만 방황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상왕 이성계는 다시 개경을 떠나 소요산으로 갔다. 그곳에 유명한 스님이 있어서 별전(別殿)을 짓고 눌러 앉으려고 했다.
이에 태종이 직접 소요산까지 찾아가서 개경으로 돌아올 것을 간청하기도 했는데 그때 “그대들의 뜻은 내가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라고 대답하고 공중에다 큰소리로 “나도 이미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고 외쳤다.
방황하던 이성계는 아예 속세를 떠날 결심을 굳혔다. “나도 이미 서방정토로 향하고 있다”는 외침이 그런 마음이었다. 소요산의 별전에 머물던 이성계는 태종 2년(1402) 6월 9일 무학대사가 있는 회암사로 행차했다. 소요산에 머문 지 거의 7개월 만의 일이었다.
회암사에서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계(戒)를 받고 보살이 됐다. 머리만 깎지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출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태종이 문안한다는 명분으로 회암사로 찾아오기까지 했다. 이성계는 회암사에 4개월가량 머물렀지만 방황에서 헤어나지는 못했다. 회암사로 갈 때는 출가하려던 마음이었지만 결국 태종의 방해로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이성계의 방황은 마침내 미움과 복수의 감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태종 2년(1402) 10월 27일 이성계는 금강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명나라 칙사 온전(溫全)을 마중한다는 핑계로 회암사를 떠나 연천 방향으로 행차했다. 하지만 속셈은 고향 동북면으로 갈 생각이었었다. 이번에는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서 군대를 일으켜 태종에게 복수하려고 했다.
수상하게 생각한 태종은 경호를 명분으로 감시 병력들을 딸려서 보냈다. 하지만 이미 복수를 결심한 이성계는 그 감시 병력들까지 협박해 동북면으로 데리고 갔다. 감시 병력들이 “태상왕께서 칙사를 마중한다고 하셔서 주상전하께서 저희들을 보내 시위하게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깊이 먼 지방까지 들어간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습니다”라며 가려고 하지 않자 이성계는 “너희들은 모두 내가 기른 군사들인데 지금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느냐?”라며 눈물을 흘렸다.
제1차 왕자의 난을 아들과 군대의 배반이라 생각하며 복수심이 극에 달한 터라 이렇게 쉽사리 눈물을 보일 정도로 감정이 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감시 병력들은 마지못해 동북면으로 동행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11월 4일 김화를 거쳐 11월 8일 철령을 넘고 9일에는 함흥으로 향했다. 11월 4일 김화를 출발하기에 앞서 측근 환관 함승복과 배상충을 미리 동북면으로 보내 군대를 모으게 했다. 11월 5일 안변부사 조사의(趙思義), 영흥판관 김권(金?) 등 동북면의 실력자들이 군대를 일으켰다. 조사의는 바로 신덕왕후 강씨의 친족으로서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해 상왕 이성계 못지않게 분개하고 있었다.
그런 조사의였으므로 함승복과 배상충의 권유를 받자마자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다. 조사의가 군대를 일으킨 11월 5일 이후 동북면 지역은 사실상 이성계의 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11월 8일 상왕 이성계가 철령을 넘을 때는 자신의 왕국으로 입성한 셈이었다.
분노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고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두 아들과 사위를 잃고 실의에 빠진 태조 이성계(왼쪽, 김무생 분)를 그의 의제(義弟)인 퉁두란(오른쪽, 강인덕 분)과 무학대사(박병호 분)가 위로하고 있다.
이른바 ‘조사의의 난’이라 불리는 사건의 내막은 이성계가 아들 태종에게 복수하기 위해 동북면의 군대를 일으킨 것이었다. 태종은 그 군대를 진압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파견했다. 이성계와 태종의 군대는 동북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초반 전투는 이성계 측의 군대가 승기를 잡아나갔지만 일진일퇴의 상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는 점점 확대됐다. 이성계 측에는 여진족들이 가세했고 태종 측에도 후방 지원군들이 속속 가세했다. 이렇게 가다가는 전국이 전쟁터가 될 판이었다.
이성계가 조사의 등을 움직여 군대를 일으킨 것은 궁극적으로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의 감정에서였다. 그런 면에서 이성계가 냉정하게 사후대책을 세웠을 리가 없었다. 만약 복수에 성공한다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할 것인지 구체적인 대안이 없었던 것이다.
이성계 스스로도 그런 문제를 모르지 않았다. 복수에 성공한다고 해도 68세나 된 그가 다시 왕위에 올라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들에게 왕위를 넘겨줄 수도 없었다. 감정적으로는 복수를 하고 싶겠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다.
결국 이성계가 현실을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차분하게 이성적으로 설득해 복수심만 누그러뜨린다면 이성계의 군대는 허무하게 사라질 수도 있었다.
태종은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함흥으로 보냈다. 그러나 함흥차사는 가기만 할 뿐 소식이 없었다.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다. 가고난 후 소식이 없는 사람들, 함흥차사가 그들이었다. 마침내 태종은 이성계가 가장 존경하고 신임하는 무학대사를 함흥으로 보냈다.
이성계를 만난 무학대사는 “방원은 진실로 죄가 있습니다. 허나 전하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미 다 죽고 다만 이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만약 이 사람마저 없애버린다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핏줄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 원컨대 세 번 생각하소서”라고 설득했다.
실록에 따르면 11월 28일 연산부사 우박(禹博)이 역마를 타고 개경에 와서 상왕 이성계의 귀경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연산은 지금의 평안도 영변지역인데 이성계는 함흥에서 맹산을 거쳐 평안도 영변지역까지 갔던 것이다. 물론 군대를 모으느라 그렇게 했다. 이성계는 11월 9일쯤 함흥에 도착했는데 그로부터 9일 후인 18일에 맹산으로 갔다가 다시 10일 후인 28일쯤 영변에서 귀경 의사를 밝힌 것이었다.
미움과 복수심, 운명론으로 극복하다
조사의도 이성계를 따라 군대를 이동시켰다. 11월 24일자의 <태종실록>에 의하면 그때 조사의의 군대는 맹산과 영변의 중간쯤인 덕천에 주둔해 있었다. 아마도 조사의의 군대는 11월 18일 이성계와 함께 함흥에서 맹산으로 갔다가 다시 이성계와 함께 영변 쪽으로 이동 중인 24일 덕천에 주둔했을 것이다. 그러던 조사의의 군대는 바로 3일 후인 27일 안주에서 청천강을 건너다가 궤멸하고 말았다.
앞뒤 정황을 보면 상왕 이성계는 26일쯤 영변에 도착한 후 무학대사에게 설득돼 개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것은 곧 자신이 선동해 일으킨 조사의 등의 군대를 버렸다는 의미다. 그렇게 버림받은 조사의의 군대는 27일 자멸했던 것이다.
복수하겠다고 군대까지 일으켰던 이성계가 그토록 허무하게 복수를 접은 것은 그것이 감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의 논리 정연한 설득에 복수심이 눈 녹듯 사라진 것이었다. “만약 이 사람마저 없애버린다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핏줄에게 주는 것이 좋습니다”라는 무학대사의 말은 냉정히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무학대사에 의해 이성계는 감정을 누르고 이성을 살려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성은 다시 감정에 휘둘리고 말았다. 영변에서 평양을 거쳐 개경을 향해 가면서 감정이 솟아났던 것이다. 게다가 12월 8일 태종을 만나게 되자 그 감정은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격화됐다. 야사에서는 상왕 이성계가 태종을 만나면서 얼마나 감정적으로 행동했는지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개경의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베풀었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께서 성난 것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을 받치는 기둥을 큰 나무로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허락하고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차일 기둥을 만들었다. 태종이 태조를 만날 때 면류관에 국왕의 복장을 하고 가서 뵈었다. 태조가 태종을 바라보다가 노한 얼굴빛이 되면서 갖고 있던 활을 힘껏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에 의지해 몸을 숨기자 화살은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말하기를, ‘천명이로다’라고 했다. 이어서 옥새를 주면서 말하기를 ‘네가 갖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고 했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잔치를 시작하고 술잔을 받들어 올리려 하는데 하륜 등이 몰래 태종에게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서 잔에다 술을 따른 후 잔을 올리실 때 술잔을 직접 올리시지 마시고 마땅히 환관에게 줘서 올리소서’라고 했다. 태종이 그 말대로 해 환관이 술잔을 올렸다. 태조가 받아서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안에서 철퇴를 찾아내 옆에 놓으면서 말하기를 ‘모두가 천명이로다’라고 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태종 2년(1402) 12월 8일 이성계는 개경으로 되돌아왔다. 개경을 떠난 지 만 1년 만이었다. 그 1년 동안 소요산·회암사·함흥·영변을 거치면서 온갖 곡절을 겪었다. 그 곡절들은 모두가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일어난 방황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12월 8일 이후로 이성계는 더 이상 감정과 이성 사이에서 방황하지는 않았다. 확실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성의 힘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천명이로다”라는 말에서 나타나듯 운명에 대한 순응이었다.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을 이성이 아닌 운명론으로 극복한 것이었다.
비극적 말년은 국가권력의 오용(誤用)에서 비롯돼
사실 이성계는 운명론자라 할 만한 사람이었다. 조선을 창업하기 이전 100여 차례 이상 전투를 치르면서 이성계는 삶과 죽음, 그리고 승리와 패배가 사람의 이성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가졌다.
전쟁은 이성적으로 계획하고 준비한다고 해서 꼭 승리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우세하다고 반드시 승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성에 입각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하지만, 그 못지않게 운명이라 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졌다고 생각한 전투에서 이기거나 죽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살아난 것은 이성의 힘이 아니라 운명이었던 것이다.
이성계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확실한 방법은 천명 즉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처음에 이성계는 태종이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왕이 된 현실을 ‘배신’과 ‘불효’로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는 절대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배신’과 ‘불효’로 만들어진 현실은 처벌되고 바뀌어야 했다.
이런 생각에는 태종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태종을 처벌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고향으로 가서 군대를 일으일으키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막상 군대를 일으켰지만 뒷일을 감당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인심도 예전 같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성계 자신이 왕년의 이성계가 아니었다. 왕년에 자신을 따르던 많은 사람은 더 이상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68세의 노인에게 희망을 두지 않았다. 자칭타칭 판단력이 있는 사람은 모두가 말리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태종과 만나는 그 기회를 이용해 일거에 처벌하려고도 했지만, 그것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람도 말리고 꼭 될 것 같은 기회도 무산된 것은 결국 하늘이 시켰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곧 운명이었다. 결국 하늘은 방석이 아니라 방원에게 왕위를 주려고 한 것이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인정하고 따르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왕도정치와 패도정치의 차이를 논하는 <대학연의> ‘왕도패술지이(王道覇術之異)’에서는 왕도와 패도의 차이를 덕과 힘에서 찾는다. 힘을 위주로 하는 정치가 패도정치라면 덕을 위주로 하는 정치가 왕도다. 왕도정치의 핵심은 ‘보민(保民)’이고, 보민의 핵심은 백성을 아끼고 지켜주며 키워서 기르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백성을 아끼고 지켜주며 키워서 기를 것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국가권력이란 개인적인 미움·분노·사랑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아끼고 지켜주며 키워서 기르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실천하는 데 있다. 조선의 건국시조 태조 이성계의 비극적인 말년은 이런 이치를 모른 데서 온 대가라 할 것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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