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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名文열전① 김동성/ 한국 최초의 현장 탐사 기사…“나는 민영환의 혈죽을 직접 보았다"

바람아님 2015. 7. 30. 09:15

 [J플러스] 입력 2015-07-28

좋은 글을 쓰려면 잘 쓰여진 과거의 글들을 읽어보는 것이 우선이다. 디지털 시대 글쓰기의 시작도 아날로그 시절의 명문(名文)들을 다시금 감상해보는데서 출발한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 언론사의 한 때를 풍미했던 걸출한 문객들이 써내려갔던 명문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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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성(18901969)은 미국에서 언론학을 전공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개성 부호 집안의 3대 독자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읽고 감명을 받아 언론인이 되고자 결심했다. 기자 천성을 타고났는지 16세 때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자결한 민영환의 집에 붉은 대나무가 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직접 확인하고자 혼자서 개성에서 서울 현장까지 찾아갔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한국 최초의 언론학 전공 유학생

  그는 1909년 넓은 세상을 배우겠다고 결심하고 혈혈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립대학 신문학과에 다니며 10여 년간 유학 생활을 했다.

 귀국 후 동아일보 창간 기자로 언론인 생활을 시작한 그는 하루에 천리를 가는 말(천리마)’이란 뜻의 천리구(千里駒)라는 자신의 호 답게 한국 최초의 해외 특파원으로 1924년 중국의 군벌 내전을 현지에서 생생하게 취재했으며, 국제기자 대회 최초의 참석자, 맥아더를 회견한 최초의 한국 기자 등의 기록을 남겼다. 동아일보 조사부장을 거쳐 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당시 안재홍, 이상협과 함께 한국 초기 언론사의 3대 기자로도 꼽혔다. 그는 특히, 삽화에도 재능이 뛰어나 1920년 동아일보에 강렬한 사회 비평이 담긴 4단 만화를 직접 그리며 국내 신문에 시사만화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언론학을 전공한 최초의 언론인답게 국내 최초의 언론학 저작인 신문학(1924)과 국내 최초의 한영사전인 최신 선영(鮮英)사전(1928)도 출간했다.

그는 미국 유학 시절에도 미국 사회에 대한 여러 단상을 묶어 영어로 저술한Oriental Impressions in America(1916)를 출간했다. 이 책은 미국 사회를 바라본 동양인의 느낌을 저널리스트적인 시각으로 담은 책으로 당시 미국에서 출간된 유일한 한국인 저작의 단행본이었다. (이 책은 지난해 김희진·황호덕의 번역으로 미주의 인상이란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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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미주의 인상에 실린 김동성이 직접 그린 삽화.
유학생의 눈에 비친 뉴욕 메디슨 거리를 묘사했다.

 

정부 수립 이후엔 국내 최초의 통신사인 합동통신을 설립하고 초대 사장에 취임했으며, 이후 정치권으로 진출해 공보처장, 민의원, 국회 부의장 등을 지냈다.

 

현장을 강조한 언론관

그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언론을 떠난 연유로 인해 그동안 한국 언론사에서는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공인 언론학을 바탕에 깔고 현장을 강조했던 그의 언론관은 가히 한국 현대 언론의 선구자라고 칭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그의 저서 신문학에서 이론적인 체계를 띄는 국내 최초의 뉴스관이 제시되면서 한국 언론에서 뉴스가치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그의 공이다. 기사 작성에 있어서 역 피라미드 원칙과 같은 서구의 저널리즘 이론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도 그였다.

신문학에서 그는 기자의 자격으로 신속·견인(堅忍정확·지혜·기민5가지를 꼽았으며, “기자의 사명은 전쟁과 다름없이 수단과 방법을 있는 대로 이용하여 기사 재료를 수집하는 요령이라며 기사 재료를 수집하는 취재 과정에서 현장을 직접 확인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런 그의 생각은 해방 이후 현대적 언론이 태동하는 과정에서 일제에 항거하는 비판적인 지사형 언론 모델만 강조해왔던 당대의 많은 언론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국내 최초의 현장 탐사 기사

그의 현장 확인에 대한 소신이 담겨있는 민영환 자택 혈죽 탐방기는 사실상 한국 언론사상 최초의 현장 탐사 기사라 할 수 있다. 당시의 기록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김동성이 나중에 당시 기록을 바탕으로 사상계 19635월호에 나는 혈죽을 보았다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회상기에서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글에는 한문투가 많이 남아있어 요즘 사람들이 읽기엔 다소 생경하지만 110년 전 민영환의 자결 현장에서 피어난 혈죽이 사실임을 밝히는 생생한 현장 묘사는 가히 인상적이다.

그의 경험담이 살아 움직이는 글 속에서 김동성의 필력과 기자정신을 느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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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정공 민영환

 

민충정공 사저는 안국동에 있었다. 민충정공 누마루 밑에서 과연 혈죽(血竹)이 생겨 누마루 천정까지 닿게 자랐다. 방안에 있는 혈죽에 물을 주지 아니한 관계인지 내가 보던 때는 청죽(靑竹)이 아니라 누렇게 죽었다. 그러나 대나무 형체는 변함이 없었다.

그 누마루는 큰 집채의 동편 끝에 단간방으로 남향했고 약 3척고의 돌기둥으로 버티었으며 마루 밑은 텅 비어있는 황토바닥에서 마른 먼지만 풍긴다. 그 바닥 가운데 엄지손가락만치 굵은 혈죽 한 개가 올라오다가 마루 밑에 다 올라와서 두 갈래로 마루 틈을 뚫고 올라갔으니 그 밑에 보이기는 대나무 줄거리뿐이고 잎사귀는 없다.

내가 서울에 온 것은 혈죽을 배관(拜觀)하자는 일이 유일한 목적이므로 이왕이면 철저히 배관하려는 생각으로 나는 그 누다락 창문을 열고 내부를 자세히 돌아보았다.

혈죽은 수삭 전에 생장하였고 그동안 서울시민은 거의 모두 배관했고 내가 갔을 때는 참관자 2,3인 밖에 없었다. 누다락 창문은 구식 건물로 어느 시절에 도배했는지 창살의 종이는 갈가리 찢어졌으니 평상시 민충정공의 검소한 생활이 여실히 표현되었다. 누마루 장판 널조각은 장구한 세월을 겪고 엄지손가락만치 틈이 죽죽 났다. 이 위에 유자 장판을 발랐으나 역시 여러 해 지나서 틈이 해졌다. 이 장판 틈으로 두 갈래가 각각 자라 올라왔다. 그래서 누마루 천정까지 꽉 닿도록 키는 자랐다. 대마디는 보통 대나무보다 길죽길죽 배나 더 길게 뻗쳤고 잎사귀 총 수효는 48엽뿐이다.

나는 내 눈으로 혈죽을 과연 배관하고 약 1시간을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당시 신비함을 나는 느끼고 무어라 형언할 수 없었다. 만약 내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소문만 듣고 나는 믿을 수 없었다. 뜰 가운데 아니고 마루 밑 건조한 황토에서 대나무가 나는 것 자체가 벌써 기적이고 또 기후관계로 서울 근방에는 이렇게 키가 크게 생장하는 대나무는 있을 수 없다.

공의 저택은 단층이다. 그러나 땅 위에서 방안 천장까지 적어도 2223척은 될 만치 자랐고 기이하게도 천정에까지만 키가 닿고 말았다. (중간 생략)

누가 남방에서 이식하였다 가정해도 하필 두 갈래로 올라온 대나무를 갖다가 판장 틈으로 자라나게 했다고도 할 수 없다. 몇 달 전에 관람한 사람의 증언을 들으면 그때는 대가 방 한가운데쯤 올라 왔다 하니 그 후에 키가 더 자라서 내가 배관할 때는 천정까지 닿고 그 이상 더 자란 것은 아니다.

그러면 누가 이식했다고는 추측도 할 수 없고 자연 생장을 긍정하는 수밖에 없다. 마루 밑 메마른 황토 속에서 어떻게 대나무가 생장했는가는 수수께끼 같이 풀어 낼 수가 없다.

민충정공은 19051130일 오전 6시에 전동 우정국 옆집에서 국권이 없어짐을 분개하여 주머니 칼로 자결하여 일사보국(一死報國)했다. 가족은 그 유해를 본저로 옮기고 피투성이에 젖은 의복을 벗기어 겨울에 쓰지 않는 누다락에 던져두었다, 그 의복에서 흐르던 핏방울은 장판지가 헤어진 틈으로 떨어져 흙 속으로 들어갔고 봄철 날씨가 되어 그 피 떨어진 자국에서 혈죽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중간 생략)

이런 기적을 나는 목도했다. 보통 상식으로 또는 근대 과학으로 도저히 해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민충정공의 일편단심은 혈죽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상할 수밖에 없다.

고려 말에 정포은(정몽주)의 선죽도 전설의 재판으로 한국 말년에 민충정공의 혈죽이 생장했고 나는 내 눈을 의심치 않는 한 분명히 배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