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세계포럼] 조선은 왜 망했나 (Ⅲ)

바람아님 2015. 7. 17. 09:57
세계일보 2015-07-15

숱한 외침 때마다 어김없이 의병 등장
애국심에 불붙일 공동체 정신 절실


조선은 지도층의 부패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실로 멸망했다. 앞서 두 번의 칼럼에서 지적한 내용 그대로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남는다. 하나의 왕조가 500년 이상 지속된 일은 세계사에 드문 현상이 아닌가. 물론 그렇다. 존속기간으로 치자면 매우 희귀한 일에 속한다. 중요한 점은 그런 조선이 외세에 무너졌고 우리 민족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한민족은 930여회의 외침 속에서, 중국이라는 대제국을 머리에 이고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다. 그 비결은? 한마디로 애국심이 아니었을까. 우리 핏속에는 애국심이란 DNA가 있다. 그것은 반만년 역사를 관통하는 배달민족의 정신이다.

중국을 무너뜨린 서양 군대가 놀란 것도 우리의 애국심이었다. 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최신 군함 5척을 이끌고 조선 원정에 나선다. 강화도에서 외적에 맞선 이들은 조선 팔도에서 소집된 호랑이 사냥꾼들이었다. 무기라고는 흰 무명옷에 낡은 구식총이 전부였다. 대포소리가 고막을 찢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포탄과 총알을 맞고 바다 위로 꽃잎처럼 떨어졌다.

당시 참전했던 한 미군 소령은 이런 글을 남겼다. “그들은 낡은 총을 쏘다가 총알이 떨어지면 돌을 던졌고 돌이 떨어지면 소리를 질렀다. 나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이보다 더 장렬하게 싸운 병사들을 다시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조선군의 전사자는 350명이었고 미군은 겨우 3명이었다. 미군은 대승을 거두고도 격렬한 저항 앞에 결국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5년 앞선 1866년에는 프랑스 함대가 이름 없는 백성들의 반격에 쫓겨났다.

애국심은 국난의 위기 때마다 왕조를 가리지 않고 빛을 발했다.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저항정신이었다. 고려 왕실이 대제국 몽고에 맞서 38년간 강화도에서 버틴 기저에는 백성들의 피 끓는 저항이 있었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일제 식민지 시절에 태극기 하나만으로 총칼에 맞서고,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것 역시 의병 정신의 발로였다.

애국심은 대한민국에서도 환생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국군은 춘천 부근에서 난생 처음 탱크와 맞닥뜨린다. 젊은 장병들은 화염병을 품에 안고 탱크 밑으로 뛰어들었다. 해외에 있던 ‘의병’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 학생 642명은 전쟁 소식을 듣고 학업을 중단한 채 조국으로 돌아왔다. 세계 역사상 처음 있는 재외국민의 참전이었다. 이들 중 135명은 조국의 산야에서 목숨을 잃었다. 학생 의병에게는 그 흔한 군번조차 없었다. 애국심이 전부였다.

배연국 논설위원
이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다. 중국을 제패한 몽고와 청나라가 왜 유독 우리나라만은 없애지 않았을까? 그들에게는 분명히 우리를 멸망시킬 힘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가 애국심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대제국을 유지하려면 필연적으로 많은 군대와 비용이 수반된다. 가령 한반도의 왕조를 없애고 자기 땅으로 완전히 복속시켰다고 치자. 그 후에 계속 독립투쟁이 일어난다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다. 왕조를 없애고 직접 통치하는 게 나을지, 왕조를 놔두고 조공국가로 삼는 게 나을지 통치 비용적인 관점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들은 후자를 택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저항정신이 부담스러웠던 까닭이다.

영화 ‘연평해전’이 개봉 22일 만에 관객 5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연평해전을 찾는 이들이 늘고, 이순신의 활동을 그린 ‘명량’이 사상 최고의 관객 기록을 세운 현상의 이면에도 애국심이 자리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애국심에만 만족할 수 없다. 애국심은 국민을 결속하는 귀한 정신이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강대국으로 이끌어주진 못한다.

로마, 영국,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에는 지도층의 청렴과 도덕적 의무가 있었다. 우리에게도 애국심의 DNA에 불을 지피자면 그런 공동체 정신이 필요하다. 한 세기 전 조선 멸망의 교훈을 오늘 가슴에 새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