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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상훈 칼럼] 한 위대한 한국인을 무릎 꿇고 추모하며

바람아님 2015. 7. 16. 09:59

(출처-조선일보 2015.07.16 양상훈 논설주간)

건국 대통령 50주기, 우리의 오늘이 그 없이 가능했는가
조국에 모든 것 바치고 빈손으로 떠난 거인, '고맙습니다' 말밖엔…

양상훈 논설주간50년 전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병자가 숨을 
거두었다.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다.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가 쏟아졌다. 옆에는 평생 수발하던 아내, 
대(代)라도 잇겠다며 들인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큰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숨이 끊어졌다.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다. 전기 작가 이동욱씨는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전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서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이 찾아와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 한국인은 실제 관에 들어가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비난받았는지 나는 안다'는 절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나흘 뒤면 그의 50주기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이 대통령 묘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알고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감옥에선 낮에는 고문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을 썼다. 
그 책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다시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의 한국어판 서문을 이렇게 썼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조금도 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 재무장과 재확장에 전력을 다하며…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이 대통령은 서문을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맺었다. 
평생 반일(反日)한 이 대통령을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볼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왜곡하며,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건국 대통령의 50주기를 쓸쓸히 보내며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난 후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친정에서 옷가지를 보내줄 때 포장한 종이 박스를 옷장으로 썼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이 대통령이 우리 음식을 그리워하자 부인이 서툰 우리말로 노래를 만들어 불러줬다고 한다. 
이 대통령도 따라 불렀던 그 노래를 이동욱 작가가 전한다. 
'날마다 날마다 김치찌개 김칫국/날마다 날마다 콩나물국 콩나물/
날마다 날마다 두부찌개 두부국/날마다 날마다 된장찌개 된장국.' 
아무도 없이 적막한 그의 묘 앞에서 이 노래를 생각하니 목이 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