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세계포럼] 조선은 왜 망했나 (Ⅱ)

바람아님 2015. 7. 16. 20:50
세계일보 2015-06-17

양반 군역·납세 회피 나라 허리 양인 몰락
지도층 도덕적 의무 국가의 덕목 삼아야

이국의 청년은 캄캄한 절벽을 마주한다. 꽉 닫힌 마음의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다. 수만리 태평양을 건너온 그였지만 조선의 현실은 바다보다 아득했다. 청년은 두 손을 모았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못하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어떻게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툭 떨어뜨려 놓으신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 주겠다고 하면 의심하고 화부터 냅니다.”

1885년 스물여섯에 조선 땅을 찾은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의 기도문이다. 청년은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이름까지 한국식으로 바꿨다. 하지만 마음의 빗장을 걸어잠근 조선 백성은 어둠 그 자체였다. 왜 조선인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손길에 의심하고 화부터 냈을까? 그것은 그들이 한 번도 그런 선의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양반에게서 수탈만 당한 백성으로선 의심은 당연한 방어본능이었다.

원래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이 꿈꾼 나라는 이런 사회가 아니었다. 정도전은 사대부가 전제왕권을 견제하는 유교적 이상국가를 추구했다. 그러나 거기엔 빠진 것이 하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었다. 사회적 지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가 조선 지배층에는 없었다.

지배층인 양반은 사회적 지위만 누릴 뿐 의무와는 담을 쌓았다. 가장 심한 대목이 군역이었다. 양반은 병역의무를 지지 않았다. 말단 자치조직인 향청 간부로 이름만 올려도 부계, 모계, 처계의 구족(九族)이 면제를 받았다. 면제의 공백은 힘없는 양인에게 수십 배의 고통으로 돌아갔다. 양반은 생산적인 노동도 하지 않으면서 농사나 장사하는 사람들을 천시했다. 이유 없이 매질하고는 재산을 뺏는 일이 흔했다. 이런 풍토에서 노동으로 부를 축적하고 국가경제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백성들이 과중한 부담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양반이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돈을 주고 양반 족보를 사들였다. 양반 숫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조선 중기에 전체 인구에서 10% 남짓이던 양반 비중은 1858년 대구지역의 경우 50%로 높아졌다. 납세와 병역을 담당하는 양인은 20%에 불과했다. 국가의 허리인 중산층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세금이 걷히지 않자 왕실은 공명첩을 발행해 관직까지 내다팔았다. 양반 비중은 급기야 90%로 치솟는다. 국가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기 어려운 구조다.

천년제국 로마는 조선과 달랐다. 왕과 귀족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으로 무장했다. 공공봉사와 기부는 지도층의 의무이자 명예였다. 공동체를 위한 희생에도 앞장을 섰다. 가뭄이 들면 공공수로에 앞서 부유층의 수로부터 끊었다.

배연국 논설위원
국가가 위난에 처하자 지도층의 의무는 더욱 빛을 발했다. 한니발 장군과의 16년 전쟁 동안 목숨을 잃은 최고지도자는 13명에 이른다. 원로원의 귀족 비중은 건국 이후 500년간 15분의 1로 줄었다. 전쟁으로 귀족들의 희생이 컸던 것이 주된 요인이라고 한다. 특권층의 숫자가 갈수록 늘어난 조선사회와는 정반대되는 현상이다. 이 둘의 차이가 국가의 운명을 갈랐다.

도덕 불감증은 오늘 대한민국에서도 여전하다. 장관과 정치인들은 병역기피를 훈장처럼 달고 다닌다. 사회적 책무는커녕 자기 이익만 앞세우는 공직자와 지식인들이 도처에 숱하다. 도덕의 위기이자 국가 존망의 위기다.

지도층이 의무를 회피하는 공동체는 오래 존속할 수 없다. 그런 풍토라면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애국심은 기대하기 힘들다. 애국심은 구성원을 하나로 묶는 시멘트와도 같다. 접착제가 없으면 구성원은 모래알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접착제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