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橫設竪設

[일사일언] 英國 보양식, 감자

바람아님 2015. 8. 12. 06:52

(출처-조선일보2015.08.12 팀 알퍼 칼럼니스트)


한국의 여름은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덥다. 
10분만 앉아 있어도 땀범벅이 되는데, 입맛이 있을 리 없다. 
그래도 기운을 차리려면 먹어야 한다. 뭘 먹어야 기운을 차릴 수 있을까. 
당연히 삼계탕이나 장어 같은 음식이다.

10년쯤 전 내가 처음 한국에 왔을 땐 영하 10도의 겨울날이었다.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보글보글 끓는 수프가 먹고 싶어졌다. 
그런데 30도가 넘는 더위 속에서도 겨울철과 마찬가지로 뜨거운 수프를 먹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땐 
충격을 받았다. 여름철 보양식은 단지 뜨거운 것만이 아니다. 
그 재료도 영국인인 내겐 생소한 것이다. 장어나 닭, 소 도가니 같은 것들 말이다. 
단백질이 풍부한 재료들이다.

영국에서는 몸이 허하다고 느낄 때면 탄수화물이 풍부한 음식을 찾는다. 
감자처럼 탄수화물을 많이 함유한 뿌리채소 같은 재료가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음식으로 치지 않는다. 
영국인들은 매년 수천만t의 감자를 소비한다.

감자는 1530년대에 처음 영국 땅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 낙후되고 가난한 축에 속하는 나라였다. 
감자는 곧 영국의 주식이 됐고, 다양한 감자 요리법이 퍼졌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은 세계 영토의 4분의 1을 식민지로 거느린 제국으로 발전했다. 
역사학자들은 동의하지 않겠지만, 나는 감자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영국에서도 스코틀랜드 음식은 특히 탄수화물이 풍부하다. 
스코틀랜드에선 감자 대신 귀리를 넣고 끓인 죽을 주식으로 삼고 있다. 
귀리는 탄수화물 함유량이 매우 높을 뿐만 아니라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생성을 돕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 귀리죽 덕분에 스코틀랜드 남자들은 그렇게 거칠고 남성적인 매력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굉장히 추운 날씨에도 스코틀랜드 남자들이 '퀼트'라고 불리는 치마만 입은 채(속옷도 입지 않는다) 통나무 던지기 놀이 같은 
스포츠를 하는 것만 봐도 귀리죽의 효능을 알 수 있다.

나는 한국 남자들이 여름철에 통나무 던지기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렇다고 기죽을 것도 없다. 
영국 남자들도 나처럼 연포탕이나 장어구이를 먹지 않으면 이곳의 찌는 듯한 더위를 버틸 수 없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