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고종, 명성황후 시해범 처벌外 배상 요구까지 고려했다”

바람아님 2015. 8. 13. 08:28

동아일보 2015-08-13

 

김영수 동북아재단 연구위원, ‘러 베베르 공사 보고서’ 공개
아관파천 당시 日공사관에 뜻 전달… 책임 추궁 함께 협상카드로 활용
피살 日人들 배상요구 포기시켜
‘명성황후 생존설’ 러 전문도 발견


1903년 11월 28일 러시아 신문 ‘노보예브레먀’(신시대)가 명성황후 초상화(왼쪽 사진)라고 보도한 것으로 국내에는 처음 공개됐다. 같은 해 고종 즉위 40주년 축하 사절로 한국에 온 카를 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가 본국에 보낸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의 일부.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제공
《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에 대해 일본 공사관에 배상을 요구하려 했다는 러시아 측 기록이 발견됐다.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범 처벌
요구 외에 일본에 대한 외교적 카드로 배상 요구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영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최근 분석한 1903년 카를 베베르 러시아 특명전권공사의 ‘1898년 전후 한국에 대한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아관파천 직후 “명성황후의 시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할 생각”이라고 일본 공사관에 전달했다. 아관파천은 을미사변 이듬해인 1896년
2월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약 1년간 거처를 옮긴 일이다. 》

베베르 공사는 이 보고서에서 “아관파천 직후 조선에서 불법으로 사업을 하던 일본인 약 40명이 살해당했고, 일본 공사관은 이에 대해 금전적으로 배상 해 줄 것을 요구하려고 했다”며 “하지만 한국 정부가 (일본 공사관에) ‘명성황후의 살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할 것’이라고 전달하자 일본 공사관은 그것을 포기했다”고 기록했다.

김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배상 요구가 언급된 국내외 문서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이 보고서는 한국 정부가 배상 요구 방침을 일본에 전달하는 한편 대일 협상카드로 사용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 보고서는 1903년 고종의 즉위 40주년을 축하하는 사절로 한국에 온 베베르 공사가 그해 4월 러시아 본국에 보낸 것으로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보관돼 있다. 김 연구위원은 “베베르 공사는 표면적으로는 축하사절로 왔지만 사실은 한러 비밀 협정 체결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에 온 것으로 추정된다”며 “그 과정에서 1880년부터 1903년까지 한국, 러시아, 일본의 관계를 정리해 보고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뮤지컬 ‘명성황후’의 포스터로 사용된 서양화가 이만익의 작품 ‘명성황후’. 동아일보DB

 

한편 김 연구위원이 최근 입수해 분석한 자료 중에는 “1895년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피신해 살아남았다”는 이른바 ‘명성황후 생존설’의 뿌리를 보여주는 것도 있다.

명성황후는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 건청궁에서 살해됐다는 게 정설이지만 피신했다는 설도 꾸준히 제기돼 왔다. 2013년에는 로바노프 당시 러시아 외무장관과 베베르 주한 러시아 공사로부터 “명성황후가 살아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독일과 영국 외교관들의 보고서가 발견되면서 다시금 조명받기도 했다.

김 연구위원은 독일과 영국 외교관들에게 명성황후 생존설을 전한 러시아 외교관들의 원래 보고 내용을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 소장 한국 관련 문서를 정리한 자료집에서 찾아냈다.

1896년 1월 2일 시페이에르 주한 러시아 공사는 로바노프 외무장관에게 “한 조선인이 ‘명성황후가 살아 있고 어딘가에 숨어있는데 러시아 공사관에 은신하기를 원한다’는 소식을 고종과 베베르 공사에게 알렸다”는 내용을 비밀 전문으로 보고했다. 또 “고종은 아직 (황후가 생존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고 적었다.

이 전문에 고종과 베베르 공사에게 황후의 생존설과 관련된 소식을 알린 조선인이 누구이고 신빙성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다. 더구나 이 조선인은 행방불명됐다. 시페이에르 공사는 “고종이 자신과 베베르에게 황후에 대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준 조선인을 찾고 있지만 아무런 결과가 없다고 며칠 전 이범진을 통해 알려왔다. 이 조선인은 행방불명됐다”고 보고했다.

김 연구위원은 “명성황후 생존설을 뒷받침한다기보다 생존설이 어디서 비롯돼 어떻게 증폭됐는지를 보여주는 문서”라고 평가했다.

조종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