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ESSAY] 지리산에 남아 있는 전염병의 遺跡들

바람아님 2015. 9. 2. 08:55

(출처-조선일보 2015.09.02 최혜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전염병 피하려고 高地에 세운 노고단 외국
선교사 유적지는 성서 改譯해 한글 보급한 터전
이를 대체한 왕시루봉 유적은 향수병 달랜 異國 건축 집합지
생존욕이 기록한 문화적 旅程

최혜영 전남대 사학과 교수 사진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는 환자 186명과 사망자 36명을 내고 종식에 이르렀다. 
분명히 우리 사회를 뒤흔든 공포였다. 공공장소에서 사소한 기침조차 혐오 대상이 되었고, 
메르스 증상이 의심되는 시민은 격리돼 일종의 유폐 생활을 감수해야 했다. 
확진받은 가정은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심리 치료를 받거나 심각하게 이사를 고려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염병은 의료 기술과 방역 체계가 발달한 문명사회일지라도 인간 세상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기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시대만 달리할 뿐 동일하게 반복된다. 
1932년 일제 경무국 조사로는 말라리아 감염자가 13만4194명이었다. 
이는 대략 식민지 조선에서 전 인구의 100명 중 한 명이 말라리아에 걸려 있었음을 말한다. 
당시 말라리아 치료제로는 서양 의사 알렌이 들여온 약인 키니네(quinine)가 있었다. 
일제는 조선 주둔 일본군을 위해서는 키니네를 적극적으로 사용했지만 민간인의 말라리아 퇴치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9년 기록에 따르면 16만명이 넘는 사람이 말라리아에 걸렸고, 비교적 사망률이 낮았던 삼일열 말라리아였음에도 
영양 결핍이나 만성적 감염 등에 의해 2000여 명이 사망했다.

말라리아를 위시한 전염병은 특히 풍토병 면역력이 약한 외국인들의 생존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1920년대 호남에서 선교 활동하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와 그 가족들 가운데 67명이나 풍토병에 희생됐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특히 선교사들의 어린 자녀는 절반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참상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묘지가 조성된 
서울 마포 양화진이나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있는 유아들 묘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영국·호주·프랑스 등 외국 선교사들은 특히 여름에 창궐하는 수인성 전염병을 피해 6~8월에는 기온이 
서늘한 800m 이상의 고원 지대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그곳이 바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지리산 노고단과 왕시루봉의 선교사 유적 수양관이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1921년 세워진 노고단 유적지는 변요한(Dr. John Preston) 선교사가 주도해 세웠던 50여 동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에 이 건물들은 선교사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과 서양식 건축 기술이 결합한 현대적 건축물이었다. 

노고단 유적은 선교사들에게는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 한철에 생명을 보호하는 피난처와 같은 곳이었지만 

그 이상의 의미도 갖는다. 1936년 이곳에서 구약성서 한글 개역(改譯) 작업이 이뤄짐으로써 당시 크게 보편화되지 않았던 

한글을 민중에게 확산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현재는 수양관의 훼손된 건물 잔해와 일부 골조만 확인할 수 있는 노고단 선교사 유적지는 한국의 생생한 근현대 역사 

현장이기도 하다. 광복 후 이념적 격동기를 겪었던 1948년 여순 반란 사건 당시 제주 4·3 사건 진압을 거부한 반란 부대원들이 

지리산으로 잠입해 노고단 수양관을 거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 토벌대는 수양관을 빨치산이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을 소개(疏開)했다. 그나마 남아있던 일부 시설은 태풍 등 자연재해로 폐허가 돼 지금은 거의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다.

노고단 수양관이 폐허가 되자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다시 여름철 풍토병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를 대체할 곳을 물색하게 됐고, 

그곳이 현재까지 보전되고 있는 왕시루봉 유적이다. 

1962년 조성된 이곳은 가옥 10채와 교회 한 채, 창고 한 동 등이 남아 있다. 

미국의 간이 건축물 축조 방식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노르웨이 선교사가 지은 북유럽식 가옥, 호주·영국식 요소가 보이는 가옥, 

주한 미군에서 사들인 콘센트 막사(교회) 등도 확인된다. 

여러 국가의 건축 양식이 반영된 것은 출신 국가별로 오랜 타국 생활에서 생기는 선교사들의 향수병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난방 시설은 장마철 습기를 이기기 위한 것으로 벽난로 하나만 두었는데 풍토병에 약한 선교사들이 여름철 전염병을 피하기 

위해 조성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전염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인간의 생존 노력은 이처럼 선교사 유적과 같은 예상치 못한 유형의 공간을 창출하기도 

했다. 지리산 선교사 유적은 이국(異國), 타문화권 사람들이 우리나라 환경에 적응해 가던 과정에 나타난 생활의 한 단면이 

담겨 있다. 죽음의 공포를 피해 피신한 공간에서 이뤄진 문화적·역사적 유적지인 셈이다.

질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조성되었던 노고단과 왕시루봉 유적은 선교사라는 외국인들이 조성한 공간일지라도 

질병이라는 위기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문화적 유산을 창조해 나가는 인간의 여정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이제 메르스로 인해 어떤 새로운 제도와 문화를 남길지 후세가 평가하고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