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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130주년 발자취를 찾아서(上)]"조선에 가거라"… 25세 언더우드의 가슴이 뛰었다

바람아님 2015. 9. 20. 09:09

조선일보 : 2015.09.15 07:10

올해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같은 배를 타고 제물포에 도착해 이 땅에 개신교 복음을 전한 지 1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두 선교사는 각각 장로교와 감리교 소속이었지만 교파를 넘어 협력하며 선교·교육·의료 등의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였다. 개신교 선교 130주년을 맞아 새에덴교회(소강석 담임목사) 주최로 두 선교사의 발자취를 탐방했다.

선술집 돌며 전도하던 언더우드

뉴욕 맨해튼에서 서쪽으로 약 11㎞ 떨어진 뉴저지 주의 노스 버건(North Bergen) 마을. 지난 7일 찾은 이 마을은 언덕길을 따라 소박한 주택들이 늘어선 서민 동네였다. 그 언덕길 끝에 ‘여러분은 초대받았습니다. 예배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이란 안내문이 걸린 그로브 개혁교회가 서있다. 140년 전 주변 선술집을 순회하며 전도하던 이 교회 청년이 있었다. 유럽 각국의 이민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절이다. 무질서와 폭력이 판치던 19세기 중반 뉴욕을 그린 영화 ‘갱스 오브 뉴욕’과 비슷했을 법한 풍경, 번번이 시비가 붙고 쫓겨났지만 청년은 포기하지 않고 거듭 찾아갔다. 130년 전 조선에 복음을 전한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였다.

언더우드의 모교인 뉴브런스윅 신학교 도서관 입구에 놓인 언더우드의 흉상. 이 학교는 언더우드의 이름을 딴 글로벌 기독교센터를 세우고, 언더우드 선교학 강좌를 개설하는 등 언더우드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김한수 기자)

런던 태생으로 13세 때인 1872년 아버지를 따라 이민 온 언더우드가 1885년 조선으로 떠나기 전까지 미국에서 산 기간은, 불과 13년 남짓이었지만 그가 훗날 조선에서 30년간 펼칠 뜨거운 열정의 예열(豫熱) 기간이었다. 언더우드는 어린 시절 한 인도 선교사의 체험담을 듣고 ‘인도 선교사’의 꿈을 품었다. 뉴욕대를 졸업한 그는 선교사의 꿈을 구체화하기 위해 뉴저지 뉴브런스윅 신학교에 진학한다. 1784년 세워진 미국 최초의 신학교인 뉴브런스윅 신학교는 당시 미국 사회 해외 선교 열기의 중심이었다. 당시 언더우드의 열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뉴욕대 석사과정을 동시에 밟았으며 마지막 1년은 의학 공부를 병행했다. 새벽 5시 기상, 밤 12시 취침이 반복되는 초인적인 강행군은 해외 선교 준비 과정이었다. 물론 그 사이사이 예배 설교와 전도를 병행했고, 당시 미국 진출 초창기였던 구세군의 활동까지 도왔다. 학생과 교수들 사이에서 그의 지나치게 왕성한 활동이 논란이 될 정도였다.

언더우드의 모교인 뉴브런스윅 신학교 도서관 입구에 놓인 언더우드의 흉상. 이 학교는 언더우드의 이름을 딴 글로벌 기독교센터를 세우고, 언더우드 선교학 강좌를 개설하는 등 언더우드 연구에 힘을 쏟고 있다. (김한수 기자)

첫 장로교 전도사로 조선 땅 밟아... 4代에 걸친 한국 사랑

그가 선교지를 인도에서 조선으로 바꾸게 된 것은 1883~84년 무렵. 당시 조선은 서구인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은둔의 왕국이었다. 1883년 10월 하트퍼드에서 열린 신학교 간 선교사 연맹 총회에서 프린스턴 신학교 알렉산더 하지 교수의 “마지막 은둔의 나라인 조선의 문이 열렸다”는 선언, 그리고 “1200만~1300만명이 복음 없이 살고 있다”는 알트먼 목사의 보고서가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럼에도 선뜻 마음을 마음을 바꾸지 못하고 망설이던 어느 날 언더우드는 “네가 직접 가렴(Why not go yourself?)”이라는 내면의 메시지를 듣고 조선행을 결심한다. 4대에 걸친 한국 사랑의 시작이었다.

조선에 도착한 그는 국왕부터 천민까지 모두 만났고, 의주까지 목숨을 건 전도 여행을 세 차례나 다니면서 거리에서 전도했으며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것을 비롯해 성경을 번역하고 영한사전을 만들고 연세대를 설립하면서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세계선교잡지에 소개된 그의 선교 보고서는 미국뿐 아니라 영국, 캐나다, 호주 등의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불러들였다. 중간에 타자기 사업으로 성공한 큰형이, 귀국해 함께 사업하자고 권유했으나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갔다.

영국에서 이민 온 언더우드가 청년기에 다니며 해외 선교사의 꿈을 키운 그로브 개혁교회. (김한수 기자)

8일 찾은 뉴브런스윅 신학교 도서관 현관 바로 옆엔 언더우드의 흉상이 놓여있었다. 도서관에 세워진 유일한 졸업생 흉상으로 2011년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이 기증한 것이었다. 작년엔 개교 230주년을 맞아 언더우드의 이름을 딴 기독교 글로벌 크리스천 센터(센터장 김진홍 교수)를 설립했으며 언더우드 선교학 강좌도 3년 간격으로 개설됐다. 이 학교 100회 졸업생 언더우드가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주는 모습들이자 그가 조선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맺은 결실이다. 이 학교 김진홍 교수는 “언더우드는 복음 전파에 그치지 않고 교회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크리스천 코리아’라는 장기 비전을 갖고 있었다”며 “미국 선교 역사에서도 유례가 드문 성공 사례”라고 말했다.

언더우드의 모교인 뉴브런즈윅 신학교. (김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