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은둔의 나라 조선에서.. 바로 天國으로 갈 걸세"

바람아님 2015. 9. 20. 23:35
조선일보 2015-9-18

[선교 130주년 발자취를 찾아서] [下] 아펜젤러와 드루신학교·랭커스터

多교파 공존 분위기서 성장해 언더우드와 협력하며 선교 활동
정동제일감리교회·배재학당 설립
그의 모교에 이름 동판 설치돼… 청년 시절 교회엔 기념 예배실

지난 8일 오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랭커스터로 가는 길. 도로 양쪽으로 이어지는 옥수수 밭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가끔씩 그 길에 마차가 나타났다. 머리엔 수건 같은 흰 모자를 쓴 여인이 수백년 전의 풍경화에서 튀어나온 듯 마차를 몰았다. 영화나 다큐를 통해 알려진 아미시들이다. 문명의 이기(利器)를 사용하지 않고 전통 방식으로 농사를 지으며 경건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진 사람들이다.

아펜젤러(1858~1902)가 청년기를 보낸 랭커스터는 이렇게 다양한 개신교 교파가 평화롭게 살아가는 곳이었다. 펜실베이니아에는 유럽 각지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넌 개신교 30여 교단의 본부가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독일개혁교회에 출석하다가 10대 후반 감리교 신자가 된 아펜젤러에게도 여러 교파가 평화롭게 사는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장차 그가 조선에서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협력한 것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아펜젤러에게 1884년 연말과 이듬해 초는 무척 바쁘게 흘러갔다. 1884년 12월 17일 엘라 닷지와 결혼한 직후 조선 선교사로 임명돼 1885년 2월 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탔던 것. 그는 출발 당시까지도 1884년 12월 4일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난 사실을 몰랐다. 1885년 4월 5일 언더우드와 함께 도착한 제물포에서 아펜젤러 부부는 미 해군 제독으로부터 제지당한다. '조선 정세가 위험하기 때문에 젊은 여성은 갈 수 없다'는 이유였다. 홀몸인 데다 의학 공부를 한 언더우드는 알렌 박사의 제중원 일을 돕겠다며 한양으로 향했지만 아펜젤러 부부는 일본으로 발길을 되돌렸다가 6월 20일에야 다시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다.


어렵게 입국한 조선에서 아펜젤러는 완전연소(完全煙燒)의 삶을 살았다. 정동제일감리교회와 배재학당 설립,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을 번역하는 한편 북부와 남부 지방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고, 독립협회 창설과 감옥에 갇힌 배재학당 졸업생 이승만 구명운동에 나서는 등 자신을 돌볼 틈 없는 나날이었다.


1900년 안식년을 얻었을 때 80㎏의 당당했던 그의 체중은 20㎏이나 빠진 60㎏대로 줄어 있었다. 드루신학교의 동문이 "귀국해서 함께 목회하자"고 권유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펜젤러의 대답은 태연했다. "나는 은둔의 나라(조선)에서 바로 천국으로 갈 걸세. 미국에서 가는 것보다 멀진 않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는 1902년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충돌·침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목포에서 열린 성경번역위원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조선에서 천국으로 직행하겠다'는 아펜젤러의 말은 예언 아닌 예언이 된 셈이다.


고향에서 아펜젤러는 '한국과 미국의 인연을 이어준 은인'으로 대접받고 있었다. 지난 8일 찾은 랭커스터제일감리교회는 지금도 한국과 미국 감리교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교회 내에는 아펜젤러 기념 예배실도 있었다. 이 교회는 아펜젤러가 프랭클린 앤드 마셜대학교 재학 중 출석하면서 1년간 평신도 설교자로 활동한 곳. 교회는 8~9년 전 건물을 개축하면서 결혼식이나 유아 세례 장소로 쓸 작은 예배당을 만들며 아펜젤러의 이름을 붙였다. 예배실의 십자가는 아펜젤러가 설립한 서울의 정동제일교회가 기증했다. 예배실 앞 진열장엔 아펜젤러 가족사진 등이 전시됐고, 배재고와 이화여고 졸업생들이 보낸 감사패가 있었다. 1901년 아펜젤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왔다가 가족을 이곳 랭커스터에 남겨두고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 교회 디파올로 담임목사는 "아펜젤러가 보내온 편지는 지역 신문에도 보도돼 교인들과 주민들에게 조선 소식을 알려주는 통로가 됐다"고 말했다.


지난 7일 찾은 그의 모교인 뉴저지 주 드루대 신학부 현관엔 27명의 이름이 새겨진 동판이 설치돼 있었다. 이 학교 출신으로 1873~1885년 외국 선교사로 나간 선배들을 기려 1886년 졸업생들이 만든 이 기념 동판 끝에서 셋째로 아펜젤러의 이름이 보였다. 이 대학 고문서연구소엔 1882년 9월 신입생 아펜젤러가 자필(自筆)로 쓴 자기소개서를 비롯해 그의 사후 2년이 지난 1904년 조선의 감리교 선교사들이 보내온 추모 행사 팸플릿 등이 보관돼 있었다. 고문서연구소 크리스토퍼 앤더슨 소장은 "개교한 지 20년도 안 됐던 시절 세계 각지로 떠난 선배들의 뒤를 이어 많은 후배가 선교사로 파송됐다"며 "노블(1866~1945) 선교사처럼 아펜젤러 선교사를 따라 조선으로 간 이도 있다"고 했다. 그는 또 "한국 유학생은 20세기 초부터 우리 학교로 오기 시작했다"며 "아펜젤러는 당시로서는 완전히 미지의 나라였던 한국의 문화와 역사, 사람들에 대해 미국에 알려준 분이다. 그렇게 시작된 역사가 130년에 이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