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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이방원에 목숨잃고 매도당한 까닭은?

바람아님 2015. 9. 30. 01:38
[문화] 지식카페 문화일보 : 2015년 07월 01일(水)
정도전, 이방원에 목숨잃고 매도당한 까닭은?
▲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

최연식의 역사이야기 - ② 경복·근정의 나라 꿈꾼 정도전

정도전은 태조 7년(1398) 음력 8월 26일 이방원에 의해 살해되었다. ‘태조실록’ 5년(1396) 7월 19일자 기록에 당시 그의 나이를 55세라고 밝혔으니, 5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셈이다. 그러나 ‘삼봉집’에 실린 일대기에도 그의 출생연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앞의 기록에 근거해 그가 1342년생일 것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출생에 관한 시비는 정도전이 살아 있던 동안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던 문제였다. 출생의 비밀은 진실한 기록(veritable records)이라는 의미의 ‘조선왕조실록’ 중에서도 ‘정도전 졸기(卒記)’와 ‘우홍수 졸기’에 가장 극적으로 폭로되어 있다. 졸기는 실록에 기록된 정치적 인물들에 대한 약전(略傳)이고, 우홍수는 고려 말 권세가 우현보의 아들로 조선 건국 직후 곤장을 맞고 죽은 인물이다. 다음은 두 졸기 중 출생의 내막을 더 자세하게 소개한 ‘우홍수 졸기’의 핵심 부분이다.

우현보의 일가붙이 중에 김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찍이 중이 되었는데, 수이라는 종의 아내를 몰래 간통해 딸 하나를 낳았다. 김전의 일가붙이들은 그 딸을 모두 수이의 딸로 여겼지만 오직 김전만 자신의 딸이라며 은밀히 사랑하고 보호했다. 나중에 김전이 환속해 수이를 내쫓고 그의 아내를 빼앗았다. 그리고 그 딸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며 노비와 전택을 모두 물려줬다. 우연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딸을 정운경에게 시집보냈다. 정운경은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으며,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이 정도전이다.

폭로의 핵심은 정도전의 외할머니와 어머니에게 종의 피가 섞여 있다는 것이었다. 단양 우씨 집안에서는 이 내막을 훤히 알고 있어서 정도전이 벼슬길에 오를 때부터 그를 경멸했다는 내용도 덧붙여졌다. 그리고 ‘정도전 졸기’에는 정도전이 천한 신분을 감추려고 우현보의 세 아들을 죽였고, 어린 세자를 등에 업고 종친을 모해하려다 도리어 자신과 세 아들이 모두 죽음을 맞았다고 기록했다. 정도전의 몰락은 개인적인 복수심과 무모한 정치적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평가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行狀·일대기)에서 어머니 우씨는 단양 출신 우연이 아니라 영주 출신의 산원(散員·정8품의 무관직) 우연(禹淵)의 딸이라고 밝혔다. 적어도 이 기록에 따르면 정도전의 외할아버지는 우현보 가문의 우연과는 본관도 이름도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왜 우현보 가문에서는 정도전에 대한 사실무근의 인신공격을 그토록 집요하게 퍼부었고, 태종 13년(1413)에 편찬된 ‘태조실록’은 왜곡된 사실을 그토록 상세하게 기록했을까? 원인은 그가 고려의 수구 세력에 맞선 조선 건국의 선봉장이었고, 조선 건국 후에는 정치의 안정성과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왕권에 정면으로 맞섰기 때문이다.

물론 정도전이 처음부터 혁명의 열망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공민왕이 내정 개혁의 일환으로 유학 부흥을 추진할 때 성균관에 들어가 정몽주, 이숭인 등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당시 성균관에서는 정몽주가 중심이 되어 성리학 연구를 이끌고 있었고, 정도전은 정몽주의 명성을 듣고 직접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이때부터 둘은 사제지간이자 친구의 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고, 1370년에는 정도전이 성균관 박사에 제수되면서 함께 성리학을 강의했다.

성균관을 중심으로 이어가던 정도전의 초기 관직 생활은 1374년에 공민왕이 시해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이때 정도전은 정몽주와 함께 공민왕 시해 사실을 명나라에 보고하자고 주장했다. 당시 권력자였던 이인임은 정도전의 주장을 일단 수용하긴 했지만, 그가 선택한 외교정책 기조는 친명 정책을 버리고 친원 정책으로 회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1375년 북원(北元)이 명나라 협공을 제안하는 사신을 파견하자, 이인임은 정도전에게 북원 사신을 영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정도전은 그들의 목을 베거나 명나라로 압송하겠다며 이인임과 논전을 벌였고, 이인임의 노여움을 산 끝에 전라도 나주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

정도전이 유배되어 2년간 살았던 곳은 회진에서도 부곡(部曲) 마을인 거평(居平) 땅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천민들과 부대껴 살면서 성리학에 기대어 그렸던 개혁의 꿈은 잠시 접었다. 하지만 이 기간은 그에게 자신을 돌아볼 소중한 성찰의 기회였다. 그는 이곳의 농부, 야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능력과 시기를 헤아리지 못한 채 설익은 이상을 함부로 드러냈다는 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정치적 시련을 겪으며 지식인의 꿈을 현실에 맞춰가는 법을 배운 셈이다.

회진현에서 2년간 유배 생활을 보낸 정도전은 1377년 7월 고향으로 거처를 옮겼고, 4년 뒤에는 삼각산 밑에 삼봉재(三峯齋)라는 재실을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곳 출신 재상이 재실을 헐어버려 학생들을 거느리고 부평부(富平府) 남촌(南村)으로 이사했는데, 그곳에서도 왕모(王某)라는 자가 별장을 짓는다고 재실을 헐어버려 다시 김포로 이사해야 했다. 유배를 떠난 1375년부터 함주의 막사로 이성계를 찾아간 1383년까지 8년간 정도전은 유배와 유랑을 전전하며 변덕스러운 세상의 인심을 익혀 갔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이성계를 찾아 함주로 갔다. 함주 막사에 도착한 정도전은 이성계의 군대를 칭송했다. 그러고는 군영 앞 노송 껍질을 벗겨내 시 한 수를 적었다.



아득한 세월 견딘 한 그루 소나무

蒼茫歲月一株松

첩첩 깊은 청산에서 잘도 자랐구나

生長靑山幾萬重

좋은 시절 훗날에 다시 볼 수 있으려나

好在他年相見否

인생살이 돌아보면 묵은 자취인 것을!

人間俯仰便陳踪



이성계의 호가 송헌(松軒)이었기에 소나무는 이성계를 가리킨다. 시의 전반부는 모진 풍파를 견디며 변방을 지킨 이성계와 잘 훈련된 그의 군대를 칭송한 것이다. 그러나 시의 후반부는 훗날의 혁명을 기약했다고 보기에는 시인의 심정이 애잔하다. 훗날의 만남을 고대하지만 인간의 기약이란 결국 해묵은 흔적처럼 아득히 잊히리란 걸 시인도 잘 알고 있었다.

정도전은 1384년 여름 다시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해 7월 전교부령(典校副令)에 복직되었고, 1385년 성균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곧바로 외직을 자원해 남양부사로 떠났다가 3년 만에 중앙 정계로 복귀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그를 성균관 대사성으로 추천했기 때문이다. 꿈을 찾아 나선 지 5년 만에 이성계의 동반자가 되어 새로운 문명의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위화도 회군이 조선 건국의 제1보였다면, 마상(馬上)의 건국을 제도의 건국으로 이끈 주역은 정도전이었다. 그는 위화도 회군 직후 혁명 세력의 경제적 기반 확보를 위해 토지개혁을 주도했고, 혁명 성공 후에는 새 국가의 설계도를 마련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 정도전 졸기도 이 점에 대해서만은 “개국에 도움이 될 만한 모의에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로 후한 평가를 내렸다.

1392년 7월 17일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사흘 뒤에 정도전에게 도평의사사의 기무와 인사를 관장하는 상서사 업무에 참여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7월 28일 17개조의 국정 개혁방침을 담은 즉위교서를 반포했다. 교서는 정도전이 작성한 것이다. 정도전은 신생국 조선을 문무를 겸비한 건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국초부터 동분서주했다. 1392년 10월에는 명나라에 가서 조선 건국의 전말을 보고하고 이듬해 3월 귀국했다.

1393년 7월에는 ‘납씨곡(納氏曲)’을 포함한 여섯 편의 악장을 지어 올렸다. 악장의 내용은 이성계가 무덕과 문덕을 겸비했으므로 왕위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이 제시한 제도적 청사진의 본령은 1394년 5월에 편찬한 조선 최초의 헌법전 ‘조선경국전’이다. 이 책은 ‘주례’의 육전(六典) 체제에 따라 편찬되었지만, 정도전은 ‘주례’에 없는 ‘정보위(正寶位)’ ‘국호(國號)’ ‘정국본(定國本)’ ‘세계(世系)’ ‘교서(敎書)’ 등 다섯 개의 정치적 총론 조항을 덧붙였다. 이 조항들은 왕실과 국왕의 위상과 권위에 관한 내용이지만, 정도전의 숨은 의도는 국왕의 권한과 책임을 법령으로 규정함으로써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적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었다.

‘조선경국전’의 종묘, 사직, 문묘에 관한 조항에는 정치권력의 상징적 공간배치에 관한 기본 구상도 제시되어 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 ‘공전’ 편에서 수도를 설계하는 데 있어 가장 시급한 과제는 궁궐이 아니라 종묘와 사직의 건설이라고 밝혔다. 종묘는 왕실의 역사적 정통성을 결정하는 공간이고, 사직은 민심을 얻는 상징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는 문묘 설치도 강조했는데, 이는 조선이 왕실만의 나라가 아니라 지식인의 나라이기도 하다는 점을 밝힌 것이었다.

1395년 9월 종묘와 궁궐이 준공되자 정도전은 태조의 명을 받아 새 궁궐 이름을 경복궁이라 정하고, 근정전과 사정전을 비롯한 궁궐 내 여러 전각의 이름을 지었다. 경복(景福)이란 말에는 태평한 왕업을 영원히 이어가라는 염원을 담았고, 근정(勤政)이란 말에는 안일과 욕망을 경계하라는 충고를 담았다. 왕실과 군주의 권위를 높이면서도 왕권의 일탈을 막으려는 소신을 궁궐과 전각의 이름에 새기고자 했던 것이다. 경복궁이 완공된 다음 해 4월에는 한성부 설계에도 참여했다.

일신의 영달이 목적이었다면 개혁은 그쯤에서 멈춰야 했다. 그러나 그는 1397년 6월 판의흥삼군부사를 맡아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표면적인 목적은 요동 정벌이었지만, 반대세력은 정도전이 병권을 장악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려 한다고 의심했다. 결국 병권은 조준에게 넘어가고 정도전은 동북면으로 정치적 외유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다음 해 8월 이방원의 사병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는 조선이 경복을 누리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임금이 근정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아가 그는 1397년 집필한 ‘경제문감별집’에 군도(君道) 편을 포함시켜 바람직한 제왕의 길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경국대전’에도 언급할 수 없었던 금기 사항이었고, 건드려서는 안 될 제왕의 역린이었다. 그래서 실록은 정도전의 최후를 제왕의 권위를 가벼이 여기다가 위협이 닥치자 목숨을 구걸했던 비열한 인간으로 그렸다.

태종 때 편찬된 ‘태조실록’은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승자의 기록이었기 때문이다.(문화일보 6월 3일자 24면 1회 참조) 

최연식/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