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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김대중은 공산주의자 아니다 공산세력을 이용하는 용공한 것” … DJ “박정희는 근대화 기틀 닦은 분 국민에게 ‘하면된다’자신감 심어”

바람아님 2015. 10. 27. 01:23

[중앙일보] 입력 2015.10.2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98> DJ의 사상·역사관 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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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생전 딱 한 번 근접 거리에서 만난 적이 있다.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DJ가 1964년 청와대 신년 인사를 하러 갔을 때다. DJ는 “박 대통령은 진실하고 소박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정적으로 맞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 일은 한번도 없다. 중앙일보가 두 사람의 대통령 재직 시절 사진을 합성, 가상 만남의 장면을 연출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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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DJ)과 대선후보 단일화, 그리고 DJP 공동정권의 탄생. 언론에서는 극(極)과 극의 만남, 물과 기름의 결합이라고 평했다. ‘과연 정치판에서는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면서 놀라움을 표시했다. 그만큼 DJ와 나는 이전까지 걸어온 길과 추구하는 철학, 역사관이 달랐던 것이 사실이다. 우리 둘은 함께하기보다는 서로 반대편에 서 있던 때가 더 많았다.

 DJ의 손을 잡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앞장선 내 선택에 의문과 불만을 제기하는 이도 많았다. 상대 후보 진영뿐만 아니라 나의 전통적인 지지층에서도 실망과 낙담을 드러냈다. 그들의 거칠고 사나운 문제 제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공산주의자 김대중을 왜 도왔느냐?’는 것이었다. DJ는 십수 년 전 대통령직을 떠났고 이미 고인이 됐지만 지금도 내게는 이러한 질문이 따라붙곤 한다.

 나는 이렇게 반문하겠다. 내가 친북 공산세력이나 종북주의자와 손을 잡을 사람으로 보이는가. 나는 6·25 남침 때 육본 정보국 북한반장, 야전 중대장으로서 공산군과 맞서 싸웠던 참전군인이다.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義)로 삼는다’는 공약을 내걸고 목숨을 건 혁명을 일으켰다. 북한 공산정권을 이길 실력을 배양하겠다며 조국 근대화에 18년간 매진해 왔다. 나는 공산주의자의 속성을 누구 못지않게 잘 꿰뚫고 있다. 언론에선 DJP연합을 두고 ‘JP가 DJ의 사상을 보증했다’고 표현했는데 나는 아무나 보증하지 않는다. 내가 DJ를 돕기로 한 건 이미 그의 사상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DJ는 진짜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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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대선 유세 중인 김대중(DJ) 신민당 후보. DJ는 4대국 부전 보장론 등 대담한 공약을 내놨다.


 DJ는 해방 직후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좌파 정당인 조선신민당에 가입한 전력이 있다. 건준과 신민당이 좌파로 기울자 8개월 만에 탈퇴했다는 것이 DJ 본인의 해명이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 그의 사상이 사회주의·공산주의 쪽으로 기울었으리라는 점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주사파 대학생의 시위가 한창이던 1980년대에 내가 자주 인용했던 철학자 카를 포퍼의 말이 떠오른다. “20대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사람이고 30대에 사회주의자이면 머리가 없는 사람이다.”

 정치인 DJ에 대해 사상 논쟁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71년 7대 대통령선거 때였다. 당시로선 충격적이었던 ‘4대국 부전(不戰) 보장론’을 공약으로 내걸었기 때문이었다. 유신 이후 DJ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소위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 과정에서 친북 재일동포 단체인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의 지원을 받았다. 이는 80년 5·17사태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가 DJ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구실이 됐다. DJ가 북한과 조총련의 불순자금을 받아 반국가단체인 한민통을 결성하고 그 수괴가 됐다는 것이 당시 죄목이었다.

 DJ는 북한으로부터 직접 돈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한민통 일본 본부를 결성하면서 조총련의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북한과 연결된 조총련과 접촉하면서도 결정적인 선을 넘지는 않았다. 그의 행동은 제한돼 있었다. 공산주의자라는 ‘레테르(letter)’가 붙을 만한 치명적인 일은 저지르지 않았다. 절묘하게 선을 지켰다. 그랬기 때문에 DJ는 80년 신군부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도 감형과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고 그 뒤 사면·복권돼 미국에도 갈 수 있었다.

 이런 DJ를 용공분자라고 칭한다면 그건 틀린 소리라고 생각한다. 용공(容共)은 공산주의를 용인한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얼굴 용(容)자를 쓰지만 결국 전신(全身)으로 공산주의자를 받아들이는 것을 일컬어 용공이라고 한다. 그런데 DJ는 그런 불순한 용공 활동에까지 발을 들이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 공산세력을 이용했지만 말이다. 조총련과의 접촉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그쪽에서 확보하려는 의도였지 조총련과 같이 공산 활동을 하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공산세력을 이용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뿐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얼굴 용(容)자의 용공 대신 쓸 용(用)자의 용공(用共)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DJ가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것도 어떻게 보면 북한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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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 4일 김종필 총리(왼쪽)와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무회의 전 대화를 나누고 있다.


 97년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DJ를 둘러싼 용공(容共)·친공의 이른바 색깔 논쟁이 달아올랐다. 한 언론사는 선거를 두 달여 앞둔 시점에 ‘대선후보 사상검증 토론회’를 열었다. 누가 보더라도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를 겨냥한 토론회였다. 한 토론자는 DJ에게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김정일이 김대중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더라. 나를 설득해보라”며 몰아세우기도 했다. 내게도 “김종필 후보의 사상엔 의심이 없지만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 국민들이 대북 정책을 믿고 따를 수 있겠느냐”며 날 선 질문을 던졌다. 나는 “김대중 총재의 대북 정책에 일부 이의가 있지만 너무 흑백논리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다. 서로 협력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받아 넘겼다. 난 이미 DJ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답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공박에 흔들리지 않았다.

 DJ는 박정희 대통령에 맞서 싸운 정적(政敵)이었다. 혹자는 그와 손잡는 것이 박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 아니냐고도 말한다. 내가 DJ와 연대를 결심했을 때 가장 크게 떠올렸던 건 그의 납치사건 때 모습이다. 73년 8월 13일 밤, 닷새 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독단적 지시에 의해 일본 도쿄 호텔에서 납치됐던 DJ가 서울 동교동 자택에서 기자회견하는 장면을 TV로 접했다. 그의 오른쪽 아랫입술과 왼쪽 눈썹 위가 터져서 피가 맺혀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가 겪었을 고통이 TV 화면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가슴속 깊이 남아 있을 그의 상처를 씻어주고자 했다. 그것이 박 대통령을 위한 일이라 여겼다.

 나는 그동안 DJ가 돌아가신 박정희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를 유심히 살펴봤다. 92년 대선 직전에 DJ는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박 대통령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의 숙제를 끝낸 기분이다. 이제는 과거를 묻고 그분의 공적만을 생각하겠다.” 득표를 위한 계산이 깔려 있었겠지만 허투루 하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97년 DJP 연대를 앞두고도 그는 박 대통령을 평가하는 발언을 했다. 97년 10월 23일 박 대통령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의 재출간 기념식에 DJ가 참석했다. 그는 “박 대통령은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의욕을 불어넣어 세계 11번째 경제대국의 기틀을 닦았다.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역사에 맡기고 그분의 정신적·현실적 공로만은 마음에 새기고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듣고 나는 ‘그만하면 됐다’고 느꼈다.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묻어났기 때문이었다. 유신 때문에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누가 뭐래도 박 대통령은 지금 우리 경제와 자주국방의 기초를 만든 분이다. DJ는 그것을 인정했다.

박 대통령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던 DJ로서는 최대한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장소와 청중에 따라 박 대통령에 대한 그의 발언 내용과 수위에 차이가 났지만 나는 크게 봐서 긍정적으로 수용했다. 그 점에선 김영삼(YS)씨와는 차이가 있었다. YS는 끝까지 박 대통령의 공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DJ는 일단 자기 논리가 서면 그에 승복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18주기인 97년 10월 26일 나는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했다. DJ와 후보 단일화를 위한 최종 만남을 하루 앞두고 있었다. 나는 추도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전두환)은 6년 동안 어른의 제사를 방해했고 한 사람(노태우)은 할 일을 하자고 했더니 대답 없이 반대 의사만 표명했습니다. 또 한 사람(김영삼)은 추모사업을 굳게 약속해놓고 이를 뒤엎었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운다고 하면서 오늘날의 토양을 만든 분을 마구 훼손하는 일은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박 대통령의 저서 출판기념회에 박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였던 김대중 총재가 참석했는데 이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정계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 몇 가지를 이뤄놓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과 거리가 있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과를 보면 내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97년 12월 대선 직전 경북 구미의 박 대통령 생가(生家)를 방문해 기념관 건립을 약속했던 DJ는 취임 이듬해인 99년 봄 공약 이행을 공식화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6·25 폐허 속에서 허덕일 때 ‘우리도 하면 된다’는 국민적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국가에 공헌하고 근대화를 이룩했다”(99년 5월 13일). “나는 어제 돌아가신 박 전 대통령과 진심으로 화해했다. 사실 지난 대선, 구미 생가를 방문했을 때는 절반은 화해를 하고 절반은 표를 의식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진심으로 화해를 했다”(99년 5월 14일). 자못 솔직한 발언이었다.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DJ는 내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한 일을 아무나 따라가진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평을 했었다.

 과거에 대한 징벌과 청산으로는 작은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 뿐이다. 진정한 역사의 발전은 용서와 화합, 통합을 통한 큰 가치의 성취로서 이룰 수 있는 법이다. 18년 전 나는 박 대통령을 대신해서 사과하는 의미로 DJ의 손을 잡았고 DJ 역시 박 대통령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했다. 분열과 대립을 멈추고 화해와 통합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과 관점이 서로 통했다.

● 소사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1980년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을 비롯한 24명에게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배후 조종해 정권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형법상 내란음모죄)를 씌워 기소한 사건. 김대중은 반국가단체인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을 구성했다는 혐의(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등으로 80년 9월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81년 1월 대법원은 김대중의 사형을 확정했지만 이후 감형과 형집행정지로 82년 12월 풀려났다. 이 사건에 연루돼 중형을 선고받았던 고은 시인 등 20명은 2003년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퇴임 뒤인 2004년 1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