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日本消息

일본의 역사 의식

바람아님 2015. 12. 6. 10:39
[세계의 베스트셀러-일본] 일본의 역사 의식,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출처-조선닷컴 2015.12.05 도쿄=김수혜 특파원)


'증오의 광고' 책 사진지금 소개하는 책 '증오의 광고'는 현재 일본 베스트셀러 목록에 없다. 
앞으로 시간이 흘러도 낄 것 같지가 않다.

그래도 꼭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일본 사회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정확하게 해부하고 있어서다. 
철학자 노가와 모토이치(能川元一)와 작가 하야카와 다다노리(早川タダノリ)가 썼다.

이 책은 사피오(SAPIO)를 포함해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사보는 대중적인 시사 잡지 3종을 대상으로 
이 잡지들이 1994~2004년에 낸 신문 광고를 분석했다.

1990년대만 해도 이 잡지들은 '난징 대학살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는 식으로 
지난 역사에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요즘은 되레 한국과 중국을 꾸짖는다. 
'일본의 역사 인식을 따지기 전에 자신의 허구를 고쳐라… 중국·한국의 부끄러운 역사 교과서' 하는 식이다.

특히 한국을 대하는 자세가 예전과는 크게 달라졌다. 
1993년 아베 신조(安倍  晋三) 당시 중의원 의원이 참석한 한·일 의원 좌담회 기사에는 '반일·혐한을 극복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이 달렸다. 그때만 해도 일본은 한·일 관계를 당연히 향상시켜야 한다고 봤던 것이다. 
반면 지금은 "언제까지 사과해야 하느냐"는 사과 피로가 팽배하다.

이 잡지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발행 부수보다 더 크다. 
잡지는 안 봐도 잡지 광고는 다들 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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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서구식 봉건제 거쳤다" 확신… 일본의 그릇된 역사 의식을 낳았다

(출처-조선닷컴 2013.03.30 김기철 기자)

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창비|372쪽|2만원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일본군 위안부 동원을 부인하는 일본의 빗나간 역사 인식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한국사 연구자인 미야지마 히로시(65)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는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우월 의식이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고 한국·중국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했다고 설명한다.

일본은 봉건제를 경험한 적이 없는 한국·중국과 달리 서구와 비슷하게 봉건제를 
거쳤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적 역사 인식이 대표적이다. 일본을 서구와의 유사성, 한국·중국과의 
이질성으로 파악하는 담론은 지금까지 재생산되고 있는데, 그 선구 격이 '봉건제'론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오늘은 가마쿠라 막부의 봉건시대와 도쿠가와 막부의 경찰국가 시대가 있어서 엄정하고 
주도한 수련 교육을 했던 시대의 선물이며…한국의 사회조직은 이 봉건제도의 결여를 답안으로 하면 
거의 그 진상을 알았을 것이다.' 
경제사학자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가 1903년 한국을 방문한 뒤 쓴 논문이다. 봉건제의 유무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 발전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다. 한국의 봉건제 부재는 정체론〓근대화 능력 부재라는 도식으로 이어져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로 활용됐다.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 학계가 '봉건제'를 발견한 것 자체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국사'(國史)를 성립시킨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말한다. 
제국헌법이 제정된 1889년부터 1904~05년 러일전쟁 사이에 천황제와 봉건제를 주축으로 일본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국사'가 등장했다. 하지만 고대 일본이 중국과 한국의 도움으로 발전한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천황제만으로 
일본의 독자성을 내세우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중세야말로 일본의 독자적 문명이 확립되기 시작한 시기라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봉건제'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일본은 유교 영향력이 약했기 때문에 

근대 문명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논리가 

19세기 말 이래 유포됐다. 

사진은 영화‘사무라이 픽션’포스터의 부분.


미야지마 교수는 일본 역사 학계의 부정적 유교 인식 또한 일본의 우월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고 비판한다. 
일본에서 유교는 보수적이며 체제 유지를 위한 것이고, 근대화를 위해 극복 대상으로 꼽히는 등 나쁜 이미지가 강하다. 
그런 유교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국과 한국에 비해, 일본은 유교의 지배력이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 위세를 떨쳤다. 유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메이지 유신기 최고의 계몽사상가로 꼽히는 
후쿠자와 유키지와 그를 계승한 마루야마 마사오 등에서도 두드러진다.

후쿠자와는 저서 '문명론의 개략'에서 '(유교가) 옛날에는 효능을 발휘했지만 오늘날에는 쓸모가 없다'면서 
유교의 폐해에서 벗어나는 것이 서양문명의 수용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마루야마도 주자학은 앙시앵 레짐(구체제)에 적합한 사상으로 파악하면서 
신분질서에 의거한 정태적인 사회체제에 어울리는 이데올로기라고 했다. 
미야지마 교수는 두 사람의 유교 이해가 주자학의 현실 비판적·변혁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근대 일본인들이 보기에 '낡은' 유교가 지배하던 중국과 한국은, 서구 문명을 성공적으로 받아들인 일본의 '문명화' 
대상일 뿐이었다. 아시아 침략 정당화로 이어지는 논리다. 
일본 역사 교과서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보는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