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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일본의 낭만적 애국심

바람아님 2015. 12. 5. 00:59

[중앙일보] 입력 201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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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소설가


11월 12일 일본 신문들은 도쿄 전범 재판을 검증하는 위원회가 총리 직속 기관으로 설치된다고 보도했다. 그날이 도쿄 재판의 선고 67주년이어서, 그 소식은 더욱 음산하게 다가왔다.

 도쿄 재판은 태평양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낸 절차였다. 일본이 1931년 만주를 침공한 뒤 1945년 미국에 항복할 때까지 일본이 저지른 무수한 잘못들에 대해 명백한 책임이 있는 전범 25명에게 책임을 물은 것이다. 소수 지도자들에게만 책임을 물었으므로, 도쿄 재판은 ‘정화법’의 성격을 지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사람들이 지은 막중한 죄들을 상징적으로 씻어낸 것이다. 그래서 독일 뉘른베르크 재판과 함께 도쿄 재판은 참혹한 전쟁을 공식적으로 끝내고 새로운 국제 질서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 절차를 일본 정부가 검증하겠다는 것은 2차대전 뒤에 마련된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일이다. 일본 헌법의 조항들을 바꾸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일본 헌법 자체가 도쿄 전범 재판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 재판은 정당성도 획득했다. 선례가 없었으므로, 재판에 대한 걱정도 컸고 법리적 문제들도 지적되었다. 실제로 인도 재판관 라다비노드 팔은 일본군이 만행들을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전범 재판은 ‘승자의 보복’이라면서 모든 피고들이 무죄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재판이 공정하게 진행되면서, 걱정은 많이 가셨고, 그 재판들을 인도한 원칙들은 국제법 속에 자리 잡았다. 특히 ‘인류에 대한 범죄’는 뒤에 나온 잔혹한 범죄들을 다스리는 개념적 기초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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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일본 정부가 이제 와서 도쿄 재판을 검증하겠다고 나선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크게 걱정스럽다. 검증으로 일본이 얻을 실익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2차대전에서 일본이 보인 행적은 너무 오만하고 부도덕하고 잔인해서, 다시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일본으로선 부끄럽고 손해를 보는 일이다.

 결국 이번 움직임의 동력은 일본 사람들의 ‘낭만적 애국심’이라는 얘기가 된다. 현대 대중은 조국의 영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그래서 조국의 역사를 체험하고 조국의 ‘역사적 권리’들을 누리려 한다. 일본 사람들로선 일본이 동아시아와 서태평양을 정복했던 1940년대 초엽을 기억하고 당시 품었던 세계 지배의 꿈을 그리워할 것이다.

 성공적 근대화로 일본이 갑자기 강성해지자, 일본 지배층은 일왕을 매개로 신과 교통하는 일본 민족이 세계를 통일하고 지배하리라는 신화적 역사관을 만들어냈다. 서양의 식민지가 된 동아시아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번영하는 ‘대동아공영권’은 그런 과정의 첫 단계였다. 물론 거기서도 지배자는 일본 민족이었고 다른 열등한 민족들은 ‘분수에 맞는’ 자리를 차지했다. 이런 신화적 역사관에 따라, 일본은 서양 종주국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차별적이고 수탈적인 정책을 폈다. 그래서 처음에 일본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했던 동남아 사람들이 일본에 대해 적대적이 되었다. 양식 있는 일본 지식인들에겐 이런 신화적 역사관을 온 일본 사람들이 따랐다는 사실이 일본군의 만행들보다 더 부끄러울지 모른다.

 낭만적 애국심은 국경 안에 머물 수 없다. 한 나라의 역사적 권리는 필연적으로 다른 나라의 역사적 권리와 부딪친다. 그래서 낭만적 애국심이 거센 지역에선 역사 전쟁이 일어난다. 전통이 단절된 적이 없고 역사에 대한 애착이 깊은 한문문명권에선 낭만적 애국심이 유난히 거세다.

 전쟁은 일으키기는 쉬우나 끝내기는 어렵다. 태평양전쟁이 그 점을 괴롭게 보여준다. 1941년 12월 일본은 펄 하버를 기습해 큰 전과를 얻었다. 일본의 희망과는 달리, 미국은 굴복하는 대신 총력전으로 대응했다. 마침내 1944년 7월 사이판의 함락으로 일본의 방위망이 무너지면서, 일본의 패배는 확실해졌다. 그러나 전쟁은 1년 넘게 이어졌고 전상자들의 다수가 이 시기에 나왔다.

 그래도 실제 전쟁은 전세가 기울면 끝난다. 역사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두고두고 나라들과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독성으로 만든다.

 1894년 5월 일본군 4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조선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내란이 일어난 조선에서 거류민을 보호한다며 일본이 일방적으로 파병한 것이다. 이 출병이 청일전쟁, 러일전쟁, 조선 합병, 만주사변, 중일전쟁으로 이어져 끝내 태평양전쟁을 불렀다. 당시 일본군을 지휘한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의 외증손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다.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총리가 전범으로 수감되었다는 사실과 외증조부가 첫 해외 출병을 지휘했다는 사실을 아베 총리가 무겁게 받아들이고 옳은 교훈을 얻기를 희망한다.

복거일/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