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日本消息

[김진국의 시대공감] 가끔은 쥐어 패고 싶은 놈이 있다

바람아님 2015. 12. 10. 00:28

[중앙일보] 입력 2015.12.05 


감정만 앞세우던 대일관계 이제 그만
日 방위상 발언 오랜 연구서 나온 것
北 급변 사태 때 우리만 못 낄 수도
긴 안목으로 국익 따지며 대비해야


살다 보면 그냥 쥐어 패고 싶은 사람이 있다. 깐죽깐죽 약을 올려 놓고, 끝내 사과하지 않는 놈. 내 약점을 후벼 파면서 법으로 따져도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놈….

그러나 상대보다 힘이 약하다면? 섣불리 주먹을 올렸다가 얻어맞기 십상이다. 폭력을 행사할 구실만 준다. 내가 힘을 기르든지, 법으로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아니면 다른 힘센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가뜩이나 미운 놈에게 무엇 하러 명분까지 주나.

우리는 일본을 대할 때 감정이 앞선다. 수없이 당하면서도 기분대로 움직인다. 그래서 얻은 게 뭔가? 객기를 부리다 명분도 실리도 다 넘겨주는 건 아닌가? 힘을 길러 넘어서지도 못하고, 법적 대응을 위한 준비도 부족하다. 그렇다고 다른 힘센 사람의 도움을 받는 외교적 포석과 관계 개선 노력도 소홀하다.

꼭 10년 전 한 일본인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 “북한에서 급변 사태가 벌어지면 누가 가장 먼저 들어갈 것으로 생각하느냐? 한국은 바로 들어갈 수 있느냐? 일본은 몇 번째 들어가겠느냐?” 도쿄의 주일미대사관이 주최한 리셉션장에서 만난 그는 무슨 연구소 연구원이란 명함을 줬다. 스포츠 머리를 해서인지 학자라기보다 낭인 분위기를 풍겼다.

무슨 엉뚱한 말이냐고 생각했다. 일본이 왜 들어가?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그 화두는 얼마 전 공개적으로 제기됐다. 나카타니 겐(中谷元) 일본 방위상이 한민구 국방장관을 만나 “대한민국의 유효한 지배가 미치는 범위는 휴전선의 남쪽”이라고 말한 것이다. 북한 문제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꼭 같은 제3국 처지라는 주장이다.

비공개 약속을 지켰느냐고 따져봐야 대화 내용 자체가 달라질 건 없다. 한 장관은 “자위대가 북한지역으로 들어갈 때는 우리 측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고, 나카타니 방위상은 ‘당신들 영토도 아닌데 무슨 말이냐’는 의미로 반박한 것이다.

이 발언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국제법적 관계를 연구해왔다. 자위대와 헌법을 다루듯이. 그렇게 미국 학자들도 설득해왔다. 무서운 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막연하다. 그냥 북한을 우리땅이라고 생각만 해왔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헌법에도 ‘한반도와 부속도서’를 영토라고 못박아놓았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받아들이느냐는 다른 문제다. 분명한 건 유엔이 남북한을 모두 회원국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두 개의 나라로 인정해놓았다는 것이다.

헌법 이외에 1991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도 있다. 이 전문에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것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는 노력은 없었다. ‘내정 불간섭’ ‘불가침’ 조항과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북한에 급변사태가 생긴다고 생각해보자. 중국 입장에선 미국의 동맹국이 국경을 접하는 것을 원할 리 없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도입을 둘러싼 갈등을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의 도덕성을 추궁하는 나라가 1억 대국이 되는 것을 도와줄까? 나카타니 발언이 왜 나왔나? 미국도 한국이 북한의 위협을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 불안할 수 있다. 지금도 한국의 중국 경사론을 제기하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북한 위협이 사라지면, 주한미군 지위도 불투명해진다.

그렇게 따지다 보면 자칫 급변사태 때 우리만 못 들어갈 수 있겠다는 걱정이 든다. 유엔이 막을 수 있다. 휴전 협상에 한국측 대표가 빠졌듯이. 한국군이 거추장스러울 수 있다. 중국과 미국, 미국을 지원하는 일본까지 끼어들 수 있다. 미국의 용인 하에 친중(親中) 군부정권이 들어서는 것도 가능한 시나리오다.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왔나. 화풀이가 아닌, 먼 안목으로 그려온 청사진이 있는가? 야스쿠니 신사 화장실에 불을 질러 무엇이 달라지는가? 정치인들이 더 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고 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왕 사과를 요구하고, 독도로 직접 가 외교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속이 후련한가? 국익에 미친 영향은 가늠이나 해봤을까?

독일도 조심스럽게 주변국을 설득했다. 강대국 독일을 원치 않는 프랑스와 구 소련마저 끌어들였다. 우리 주변국은 어떤가? 또 북한 주민은 어떤가? 주민투표를 하면. 새로운 군부정권보다 남쪽 정부를 믿고 기대할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성질만 부리다 거저먹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환상이다.

김진국 중앙일보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