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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우리가 바라는 일본'과 '현실의 일본'

바람아님 2016. 1. 2. 00:42
SBS 2016-1-1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의 후폭풍이 거세다. 일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도 못했으면서 위안부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기로 한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굴욕’ 협상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이번 합의를 파기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와 우리 국민의 정서에 한참 못미치는 이번 협상의 결과를 놓고 이런 의견이 분출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 독일과 다른 일본

우리는 보통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으로 독일과 일본을 비교한다. 2차 대전의 전범국으로 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유럽을 전쟁의 참화로 몰아넣었지만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끊임없이 사죄하는 독일, 왜 일본은 독일처럼 못하는 것일까? 일본이 아직도 올바른 사죄의 길을 걷지 못하고 있다면 주변국이 꾸짖어서라도 일본이 제대로 사죄하게 만들고 제대로 된 과거청산의 길로 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우리가 그리는 진정한 한일우호의 시발점이 바로 이런 것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일본’이 현실화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필자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본다. 일본의 우경화는 이제 ‘변수’가 아닌 ‘상수’가 됐다. 보수적인 아베 정권이 바뀌면 일본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아베 정권이 얼마나 더 갈지도 모르지만, 혹시 일본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서 일본의 우경화라는 전체적인 흐름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보수화되고 우경화돼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고 미국과의 결탁을 통해 세계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일본, 이것이 우리가 인정하고 싶든 인정하고 싶지 않든 앞으로 계속 대면해야 할 ‘현실의 일본’이다.


● ‘한일 위안부 합의’와 일본의 현실

이같은 상황에서 한일간에 이번 위안부 합의가 나왔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고 아베 총리가 일본의 내각 총리로서 사죄하며 일본 정부 예산으로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재단을 설립하기로 했다. 바로 4개월전 아베 담화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전시 하에 많은 여성들의 존엄과 명예가 깊은 상처를 입은 과거” 운운하며 하나마나한 얘기를 한 데 비해서는 상당한 진전이다. 일본 전문가들은 보수적인 아베를 이 정도까지 끌어낸 것은 성과라고 말한다. 한일 합의를 통해 우경화되고 있는 일본을 조금이나마 제어하는 효과도 거둔 것이다.


물론, 일본의 이런 조치가 우리가 생각하는 기준에는 한참 못미친다. 일본에 ‘진정성’이 있냐고? 당연히 없다. ‘현실의 일본’이 과거를 사죄할 줄 모르는 일본인데 진정성이 담겨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들이 후퇴한 것 같은 모양새를 감추기 위해 일본 언론을 상대로 엄청난 언론플레이를 해대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책임 통감’, ‘사죄’ 이런 용어를 썼지만 사실은 그런 생각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후안무치한 일본과의 합의를 파기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예’라고 답하기 위해서는 합의 파기 이후 더 나은 합의를 일본으로부터 받아올 수 있을지에 대해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현실의 일본’에서 우리가 원하는 수준의 합의는 나오지 않는다.


● 위안부 문제 전면에 내세운 것이 오류?


일각에서는 이런 합의를 할 것이었다면 아예 안 하는 게 낫지 않았느냐는 의견도 제시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일관계에 진전이 있을 것처럼 의제를 설정해 이런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만족스러운 합의를 못할 것이었다면 위안부 문제를 한일관계의 핵심인 것처럼 내세우지 말고 옆으로 제껴놓은 채 한일관계를 풀어나가는게 현명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 말도 일리는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면서도 실제로는 그다지 힘을 쏟지 않았던 것처럼, 박 대통령도 3.1절이나 광복절, 일본 정치인들을 만날 때 의례적인 차원에서만 위안부 문제 해결을 언급하고 넘어갔더라면 한일간에 위안부 담판을 벌일 상황이 오지 않았을 수 있다. 그랬더라면 위안부 피해자들과 시민단체들은 일본의 책임을 계속 추궁하고, 한국과 일본 정부는 실제로는 위안부 문제 해결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는 상황이 계속됐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게 해답인가?
 
물론, 정부가 비난받을 부분은 분명히 있다. 특히 위안부 피해자들과의 상의 없이 일을 진행한 것이다. 합의가 나오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나 관련 단체가 협상 내용을 전혀 통보받지 못했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잊게 만든다. 피해 당사자들과의 최소한의 공감대도 없이 일을 진행한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가? 피해자들의 동의를 100% 받기는 어려운 협상이었다고 해도 한일간 협상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했더라면 피해자들과 관련단체가 이렇게까지 반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엄혹한 동북아정세…한일관계도 잘 풀어야 
 
우리 정부가 여러 가지 부족한 점에도 불구하고 한일간 위안부 협상 타결에 나선 것은 한일관계를 더 이상 악화된 상태로 방치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협상은 순수하게 피해자들을 위한 협상이었다기보다는 국제정치적 맥락이 강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현실의 일본’은 우리가 선린우호의 감정으로는 대할 수 없는 일본이지만, 그러한 일본과 마냥 소원한 채 갈 수 없는 것도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동북아 정세가 미묘하게 변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주변국과의 관계를 모두 원만히 하면서 우리의 갈 길을 잘 살펴야 한다. 중국과의 관계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지만, 한국이 미국 일본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때 중국이 생각하는 한국의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지, 한국이 미국 일본으로부터 외톨이가 되는 신세가 되면 중국도 한국을 업신여길 수 있다.

‘현실의 일본’은 ‘우리가 바라는 일본’과는 한참 다른 위치에 있다. 그러한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하는 것이 한일관계를 풀어가는 바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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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식 기자cs7922@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