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조선시대 성범죄

바람아님 2016. 1. 5. 00:38
경향신문 : 2012.10.17


“11살 아이를 강간한 잉읍금을 교수형에 처했다.”(<태조실록>)

강간죄에 대한 조선의 법률은 추상같았다. 1367년 제정된 명나라 법인 <대명률>에 따른 처벌이었다.

“화간은 장 80대, 남편이 있으면 장 90대, 강간은 교수형(絞刑)에 처한다. 강간미수는 장 100대에 유배(流) 3000리다.”

(‘형률·범간조(犯奸條)’)

1404년(태종 4) 사노(私奴) 실구지 형제는 상전의 16살짜리 딸을 강간했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사’의 극형을 받았다. 

상전을 겁간했기 때문에 가중처벌을 받은 것이다.


강간은 대역죄와 존속살인 등과 함께 대사면령에서도 제외된 중죄였다.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군도 예외없는 처벌을 받았다. 

1597년 명나라 군인이 골목길을 지나던 여인을 강간하려 했다. 범인은 정유재란으로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군 파귀(頗貴) 

유격 휘하의 군인이었다. 파 유격은 군인을 종루(종각)에서 참수했다. 주한미군의 성범죄 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과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이런 일도 있었다. 1600년, 선조임금이 자신의 아들인 순화군 이보에게 ‘유배형’과 ‘녹안(錄案·전과사실을 기록하는 형벌)’을 

명령했다. “상중(喪中)에 빈전(관을 모셔둔 곳)의 여막(무덤을 지키려고 지어놓은 초가)에서 제 어머니의 궁인(宮人)을 겁간

했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

아무리 임금이라도 패륜의 자식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강간당한 여자의 정절을 문제 삼는 경우가 심심찮게 눈에 띈다. 1520년(중종 15), 귀화한 낭근손이 영의정을 지낸 고(故) 박원종의 첩을 강간하려 했다. 여인은 몸을 피해 욕을 면했다. 당연히 강간미수죄였다. 

그런데 사헌부는 ‘장 80대가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처음엔 수절하는 여인을 강간하려 한 죄로 엄히 처벌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진주가 재혼해서 아이까지 낳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절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재혼녀를 강간하면 죄가 경감된단 말인가? 가여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여인네들이다. 생각같아선 

궁형(宮刑)에 처하면 어떨까. 너무 중하다면 얼굴에 ‘난 성범죄자요’라고 새기는 자자형(刺字刑)은? 쉽게 벗을 수 있는 전자발찌보다 나을지도 모른다.


이기환 문화·체육에디터 lkh@kha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