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조선일보 2016.01.26 임민혁 정치부 차장)
작년 도널드 트럼프가 미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반짝 현상에 그칠 것"이라고
주위에 자신 있게 말했다. 4년 전 미국 특파원으로 대선을 취재할 때 이미 겪은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쇼맨십 강한 이 부동산 재벌은 당시에도 다른 후보들과 차원이 다른 자극적인 언사로 시선을 끌며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에 올랐다. 하지만 주류 정치권·언론은 "트럼프 돌풍은 미국의 수치"라며
집중포화를 퍼부었고, 몇 달 안 가서 그의 인기는 사그라졌다.
이번에도 "모든 중국 제품에 25% 관세를 물려야 한다"
"한국은 우리 일자리를 빼앗아가는데 왜 공짜로 항공모함을 보내 지켜주느냐" 같은
4년 전 무개념 주장을 그대로 들고 나온 트럼프 현상의 끝은 뻔해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대선 국면에 들어선 현재까지 1위를 달리는 트럼프의 기세는 매우 당혹스럽다. 이젠 결과와
상관없이 트럼프 돌풍을 '스쳐가는 현상'이 아니라 미국인의 변화를 반영한 '실체'로 받아들여야 할 상황인 것 같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미국 싱크탱크 관계자는 "트럼프 돌풍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미국의 몫을 빼앗아가는 외국 때리기'
선동이 서민층의 호응을 얻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몇 차례의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인들은 국제 무대에서 '대의명분' '의무감' 때문에 자신들이 낸 세금을 쓰는 데 대한
인내심이 줄어들고 있는데, 이런 정서를 트럼프가 효과적으로 자극했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지난 7년간 오바마 정부의 대외 정책에서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오바마의 미국은 국제 분쟁에서 '정의의 사도(使徒)'를 자처하며 앞장서기보다는 뒤에서 비용·책임을 다른 나라와 적극적으로
나누는 방법을 택해 왔다. 시리아·리비아·우크라이나·이란은 물론 북핵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미국은 전 세계에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는 사명을 지닌 특별한 나라'라는 '미국 예외주의'의 자부심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 같은 미국의 변화는 앞으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정책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이는 곧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친구들이 미국으로부터 날아올 더 많은 '청구서'에 대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청구서는 무기 판매, 무역 확대, 국제 원조 참여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한국이 국력에 걸맞은 대우를 받고 한·미 관계에서 대등한 목소리를 내려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납품 단가가 올랐다고 '안보 주(主)거래처'를 중국으로 갈아탈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정부는 이제 이런 현실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어느 청구서까지 수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여론을 수렴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빛 샐 틈도 없다' 식의 수사(修辭)로 한·미 관계에 대한 환상만 키워 놓는다면
미국에서 청구서가 날아올 때마다 극심한 국론 분열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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