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事論壇/國際·東北亞

'쯔위 사태'의 서브 주연, 따지고 보면 미국이었다

바람아님 2016. 1. 22. 00:28
[게릴라 칼럼] 쯔위 논란 불러온 '하나의 중국' 원칙, 확산 도운 건 '닉슨 독트린' 

 오마이뉴스 2016-1-21

[오마이뉴스 글:김종성, 편집:김준수]


쯔위로 인한 논쟁이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걸그룹 트와이스의 대만 출신 멤버인 쯔위가 휘말린 이 논쟁의 본질은 '하나의 중국' 문제다. '둘'을 의미하는 트와이스(Twice)의 멤버가 이렇게 '하나의 중국(One China)' 원칙에 휘말려 논쟁의 소용돌이로 쓸려 들어간 셈이다.

JYP 엔터테인먼트에 속한 쯔위는 지난해 11월 한국 TV 프로그램 '마이 리틀 텔레비전' 촬영 중에 대만 국기를 흔들었다. 당시 각 멤버가 자국 국기를 흔드는 상황에서 나온 모습이었다. 2016년 1월, SNS를 통해 해당 장면을 본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 사람들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훼손했다며 쯔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논란 이후, JYP엔터테인먼트의 공식 유튜브 채널에 사과 영상을 올린 쯔위.
ⓒ JYP엔터테인먼트

'쯔위의 사과', 대만과 중국의 정서 모두 건드렸다

곤경에 처한 쯔위는 인터넷에 공개한 영상을 통해 사과의 뜻을 발표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대만(타이완) 즉 중화민국의 여론이 들끓었다. 대만 사람인 쯔위가 대만 국기를 든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하는 장면이 대만인들의 감정을 자극한 것이다.

이러한 대만의 분위기는 때마침 치러진 총통 선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줬다. 지난 16일 치러진 선거에서, 대만의 자주성을 주장하는 민진당의 차이잉원 후보가 압도적 표차로 당선되면서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쯔위의 굴욕'이 대만인의 정서를 건드린 게 차이잉원 후보한테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도 이어졌다.   


참고로, '하나의 중국' 원칙과 유사한 것이 대한민국 헌법에도 있다. 헌법 제3조에서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로 한다"고 했다. 한반도 전체의 합법 정부로 대한민국 하나만을 인정했으니, 우리 헌법에서도 '하나의 한국' 원칙을 규정하는 셈이다. 이에 비해, 북한 헌법 제9조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북반부에서 인민 정권을 강화하고 …… 조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투쟁한다"고 선언했다.


만약 중국과 대만 간의 힘의 차이가 남북한의 차이 정도밖에 나지 않는다면, 대륙 중국인들이 대만인인 쯔위의 행위를 문제 삼고 그에게 '하나의 중국' 원칙을 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양쪽 간에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일도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대만이나 홍콩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에 대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요구하고 있다. 분명히 중국 내부의 원칙인데도, 이것은 어느새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거부하면서 중국과 교류할 수 있는 국가는 아마 없을 것이다.


중국이 국제적 차원에서 '하나의 중국(One China)' 원칙을 관철시킬 수 있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중국의 국력과 노력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미국의 기여도도 작지 않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 국제적인 구속력을 갖게 된 데에 미국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 이 원칙과 관련하여 중국이 '주연'이라면, 미국은 '서브 주연'쯤 된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의 비중이 커지게 된 데는 베트남 전쟁이 적지 않은 기능을 했다. 미국은 베트남 민족 내부의 전쟁에 개입하여 이를 '미국 대 베트남'의 전쟁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로 인한 결과가 '하나의 중국' 원칙이 확산되는 데 기여하게 됐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손잡은 상대는 '중국'

 베트콩의 모습.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 미국은 북위 17도 이북의 북베트남(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상대로 대대적인 폭격을 감행했다. '북폭'을 벌인 것이다. 이때만 해도 미국은 북폭이 자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측하지 못했다.

1968년 1월, 북베트남과 베트콩(베트남판 빨치산)이 남베트남 전역에서 일제 봉기를 개시했다. 미국은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었다. 이때서야 백악관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제야 미국 정부는 자신이 수렁에 빠졌다는 것을 알았다. 까딱하다가 세계 패권을 잃을 수 있다는 점도 알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1969년 1월 리처드 닉슨이 제37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닉슨이 해야 할 일은 전임자인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벌인 일을 최대한 빨리 수습하는 것이었다. 그는 미국의 영향력 추락을 신속히 막아야 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69년 7월 '닉슨 독트린'이다. 이 선언의 핵심은 '앞으로는 미국이 베트남 전쟁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아시아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닉슨 독트린 이후 미국은 영향력 추락을 차단하고자 아시아 지역에서의 충돌을 피했다. 충돌을 막자면 국제적 긴장 완화가 필요했다. 긴장을 완화하자면 미국의 의지만으로는 부족했다. 영향력 있는 아시아 대국과 손을 잡아야 했다. 그 대상이 바로 대륙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이었다.


그때까지 대륙 중국은 미국의 적성 국가였다. 한국전쟁에서 정면으로 충돌한 나라였다. 그런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는 것은 미국의 영향력 추락을 막는 데뿐만 아니라 소련을 견제하는 데도 좋았다. 이 점은 중국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이념 분쟁 및 국경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소련 견제에 유리했다.

이런 이해타산 속에 닉슨 독트린 이후의 중국과 미국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두 나라의 화해 움직임은 세계적 규모의 탈 냉전 즉 '데탕트'를 촉진했다.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사이의 엄격한 벽이 허물어지면서, 한쪽 진영 국가가 다른 쪽 국가와 손을 잡는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중국' 원칙, 미국이 세계적 공인 도왔다

 리처드 닉슨과 주은래.
ⓒ 위키페디아 백과사전

이런 데탕트 속에서 미국이 중국에 선물한 것이 있다. 바로 '하나의 중국' 원칙이다. 닉슨 독트린이 발표된 지 2년 뒤인 1971년 10월, 미국은 유엔을 움직여 중화민국(대만) 대신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대만이 갖고 있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도 중국이 갖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륙과 대만을 포함한 전체 중국의 대표권을 갖도록 만들었다.

이 때문에 대만은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유엔 회원국 지위에서도 쫓겨났다. '대만은 중국이라는 울타리에 갇혀 있고 그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서만 대표된다'는 논리로 인해 대만은 유엔 무대에서 국가의 지위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넉 달 뒤인 1972년 2월,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다. 닉슨은 주은래(저우언라이) 총리와 더불어 상하이 공동성명이라는 역사적인 성과물을 만들었다. 이 성명에서 미국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공식적으로 수용해주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의 중국' 원칙은 단순히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방적 주장에 머물지 않고 유엔을 포함한 세계무대에서 사실상의 공인을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은 더 강해지고 대만은 더욱 약해지게 되었다.

대만은 1970년대에 미국·일본이라는 핵심 동맹국을 잃은 데 이어 1990년대에는 한국이라는 친구마저 잃었다. 그것을 계기로 동북아 국가들에 환멸을 느낀 대만은 이른바 '남방 정책'을 통해 동남아와 태평양으로 눈을 돌렸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이해관계가 상대적으로 약한 곳에서 활로를 모색하게 됐다.


이렇게 베트남 전쟁에서 수렁에 빠진 미국이 자구책의 하나로 대(對)중국 관계개선을 추진했다. 관계개선의 목적으로 중국의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입을 도와주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해주면서 이 원칙은 사실상의 세계적 공인을 얻게 되었다.

한국 연예계와 대만 선거를 뒤흔든 쯔위 사건에는 이러한 사연이 있다. 베트남 전쟁으로 엉망이 된 미국의 다급함이 이 사건의 먼 배경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국은 이번 쯔위 사건의 '서브 주연'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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