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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 칼럼] 이중 호적의 나라

바람아님 2016. 2. 27. 15:36

(출처-중앙일보 2015.03.24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한반도에 집적된 모순을 증폭시키는 대국(大國)들의 압박이. 
국제적 압박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19세기 말부터 작동해온 열강의 각축전은 한국에 ‘해양국가(세력)’이자 ‘대륙국가’라는 
이중 호적(戶籍)을 부여했다. 
‘해양세력’은 한·미·일 군사동맹이고, ‘대륙세력’은 반일(反日)로 다져진 한·중 역사동맹이다. 
두 개의 호적을 가진 한국이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와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AIIB) 압박에 성급한 답변을 내놓을 수는 없다. 
세간의 비난을 받는 ‘전략적 모호성’이 일단은 현명해 보인다. 
그런데 미국·일본의 밀월여행 소문에 사안이 다급해졌다.

 과거사 옹호에 철벽 같은 아베 총리를 전격 초청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터였다. 
지난달 초 KBS가 기획한 다큐멘터리 촬영차 일본에 들렀을 때 자위대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극우파 인사 다모카미 도시오
(田母神俊雄)와 마주 앉았다(이 장면은 방영되었다). 
필자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의 답은 단호했다. “매춘입니다.” 
그럼 난징학살은?” 역시 짧은 답, “역사날조이고 조작입니다.” 
모든 일본인이 이렇다는 건 아니지만 이런 극우논리에 동조세력이 늘어난다는 게 문제다.

 그 정점에 있는 아베 총리를 초청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일본과 전쟁을 선포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상·하원 합동연설을 
베풀 예정이란다. 소모적 역사분쟁에 휘말리기보다 실익을 챙기자는 미국의 실용주의적 결단에 한국은 좌불안석이다. 
식민지 상처가 사무치는 한국으로서는 미·일 군사동맹의 전략적 댄스를 볼 수가 없다. 
‘정의의 대국’이 할 짓이 아니라고, ‘위안부 문제’는 어디 갔느냐고 해봐야 무용한 절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은 사드 배치에 모호한 태도를 보인 한국에 약간 화가 난 상태다. 
미국의 품에 안긴 일본은 은밀히 속삭일 것이다. 
‘군사대국으로 거듭나는 우릴 믿어 주세요’라고. 군사대국, 그것은 일본이 죽도록 그리워하는 제국(帝國)의 한쪽 팔이다.

 여기에 중국은 역사동맹의 의리를 지키라는 문명적 압력을 황사바람에 실어 보냈다. 
AIIB는 유럽과 아시아에 개발자금을 지원하는 ‘금융의 정화함대’, 
이미 중국은 400억 달러에 달하는 신실크로드기금을 창설해 돈을 살포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G7 핵심국인 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가 가입을 결정하자 궁지에 몰린 
미국이 최후의 보루로 삼은 나라가 바로 한국과 호주다. 호주가 넘어갔다. 
마지막 남은 한국의 선택이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을 내세워 미국이 주물렀던 
세계 경제지배권 판도를 바꿀 만큼 무게가 실린 이유다. 
중국 외교부장은 시진핑의 밀지를 청와대에 전했을 것이다. 
‘아시아에 남을래, 아니면 미국에 투항할래?’

 상대세력의 요구를 거절하라는 것은 대국 압력의 변함없는 본질이다. 
1885년 영국의 거문도 점령은 조선이 러시아를 받아들이지 말라는 무력시위였다. 일본은 청과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을 
끝장내려 두 차례의 전쟁을 불사했다. 무기력했던 약소국 조선은 이리저리 끌려 다녀야 했다. 
그러다가 두 개의 호적을 갖게 됐다. 미국 주도의 해양호적과 중국 주도의 대륙호적. 
이중 호적은 궁지인가 기회인가? 필자는 확신한다.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궁지이고, 양쪽을 다 선택해야 기회라는 사실을. 그래야 지렛대가 생긴다. 
몽골 같은 내륙국가는 이런 지렛대를 가질 수 없다. 대륙진입의 입항이자 일본 열도의 심장부를 겨누는 칼날인 한국은 
그 자체 지렛대가 될 운명이다. 단, 국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일본처럼 부유(浮游)하는 운명을 피할 수 있다.

 일본은 패전 후 아시아로 돌아오려 했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다. 반성이 부족했다. 
아니 일왕이 건재하는 한 철저한 반성 자체가 불가능했다. 
아시아 국가이면서 아시아가 아닌 국가, 부유하는 일본의 모순이 거기에 있다. 
과거사 반성을 회피할수록 아시아에서 멀어지는 일본이 갈 곳은 망망대해, 태평양뿐이다. 
한국이 떨어져 나가는 일본을 좇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양세력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도 위험하다. 
아니 고맙기까지 하다. 
핵을 이고 사는 우리 형편에서 중국이 북한 핵을 통제한 것도 아니고, 그 위태로운 미사일 장난을 그만두게 한 것도 아니다. 
북한은 이미 100여 개 소형 핵무기를 개발 완료했다는 보도가 국제적 우려를 증폭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국 정부가 보인 전략적 모호성은 결국 이 지렛대를 튼실하게 만드는 안개전술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대국이 제시한 데드라인까지 막후교섭을 통해 설득하는 것, 양자택일(兩者擇一)이 아니라 양자택이(兩者擇二)로 
‘핵억제’와 ‘역사정체성’이라는 두 개의 뇌관을 동시에 확보하는 것이 곧 이중 호적의 이점을 증폭하는 것임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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