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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권침해·성추행 당해도 냉가슴만.. '슬픈 대학원생'

바람아님 2016. 3. 7. 23:43
세계일보 2016.03.07. 19:11

“미쳤냐? 왜 니 노력과 의지가 부족한 걸 남 탓으로 돌려. 왜 그딴 식으로 사나.”

지난해 한 지방 국립대 대학원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혜영(여·가명)씨는 지도교수에게 휴학신청서를 내밀었다가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 식이·수면·불안장애 등을 동반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처방약을 과다복용해 자살까지 기도한 김씨가 ‘살아보기 위해’ 내린 결단이었지만 철저히 무시당한 것이다.


이 지도교수는 이어 “니 의지가 약해서 아픈 거 아냐. 매일 아침 운동장 10바퀴씩 돌고 실험한 뒤 보고해”라며 위로 대신 김씨 속만 할퀴었다. 책상 위 논문 더미를 집어던지기까지 했다. 절박한 김씨가 “교수님, 저 살리는 셈치고 도장 좀 찍어주세요”라고 애걸하자 그는 “넌 내 제자가 아니다”며 도장을 던지고 연구실을 나갔다.



성추행 사건을 지도교수에게 알렸지만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정신적, 신체적 질환에 시달리다 결국 휴학하게 된 대학원생 김혜영(여·가명)씨의 사연을 담은 웹툰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 7화 ‘사라졌다’ 편 일부.
고려대대학원 총학생회 제공

이날 김씨가 느낀 모멸감은 악몽과도 같은 3년 전부터 시작됐다. 석사과정을 밟던 어느 날 밤 연구실을 나서다 다른 대학원생에게 성추행을 당한 것이다.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끙끙 앓다가 용기를 내 피해사실을 알렸지만 교수는 사태를 덮는 데 급급했다. “(여기저기 알리지 말고) 우리 선에서 해결하자”더니 가해 학생 지도교수에게 “그 친구 간수 잘하라”고만 했다.

이후 김씨는 우울증과 함께 토할 때까지 먹어야 하는 식이장애가 생겼다. 수업 준비로 밤샘이 잦아지자 수면장애까지 겹쳐 며칠씩 잠을 자지 못했다. 안면 피부가 벗겨지고 피가 나는 후유증까지 생겨 여성으로서 감내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됐다. 그런데도 한 교수는 “돼지가 공부라도 잘해야지 않겠냐”는 등 인신공격성 발언을 서슴없이 해댔다. 자꾸 사람을 피하게 된 김씨는 급기야 길을 지나는 사람이 자신을 욕하고 숨겨둔 흉기로 해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었고 ‘죽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대학 3학년 때부터 학부연구생 제도를 통해 연구실 생활을 시작하면서 다이어리에 ‘정말 대단하고 멋진 분이다’라고 교수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던 김씨는 “5년간 연구실에 ‘갈아 넣은’ 내 청춘이 백지가 됐다”며 대학원 진학을 반대한 부모의 얼굴을 떠올렸다. 

김씨의 사연은 최근 고려대대학원 총학생회가 전국 대학원생의 제보를 받아 연재하고 있는 웹툰 ‘슬픈 대학원생들의 초상’ 7화 ‘사라졌다’ 편에 담겼다. 지난해 ‘인분교수 사건’ 이후 대학원생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노골적인 인권 침해부터 부당한 지시까지 대학원생을 둘러싼 열악한 환경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


7일 고려대 ‘대학원 연구환경개선사업 조교근무환경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조교로 근무한 대학원생 159명 중 46명(29%)이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이들이 당한 인권침해 유형(복수응답)은 불합리한 업무전가(40%)가 가장 많았고 교수의 직권남용(28%), 차별(13%), 성추행·성폭행(10%), 폭력 (7%)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고 학업이나 진로상 불이익을 겪을까봐 고작 15%만 문제를 제기했다. 전체 응답자 중 101명이나 인권침해 시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인권연대 오창익 사무국장은 “우리 사회가 인권교육 불모지인 점을 감안하면 조사 결과보다 훨씬 많은 학생들이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을 것”이라며 “일부 대학처럼 캠퍼스 내 인권센터를 설치하는 등 대학 공동체의 전방위적인 노력이 당장 시작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승환·조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