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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봄날의 미풍은 오색 무지개

바람아님 2016. 3. 30. 10:43
[중앙일보] 입력 2016.03.29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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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임
화가·삼육대 교수


사흘 후면 마음마저 밝아지는 사월이다. 마른 가지에 연한 색색의 컬러가 아롱지고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조급함을 드리운다. 꽃봉오리처럼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행인들의 원색 컬러 옷차림이 눈을 즐겁게 한다. 마음은 봄날의 미풍이 그리워 마구 요동친다.

봄날의 미풍을 색으로 표현하면 어떤 색일까? 봄에 관한 색들의 조화를 떠올릴 때 ‘오색 무지개’라는 말이 입에 맴돈다. 오색이란 말은 다채로운 색채감을 표현한 정감 있는 표현 같다. 문화와 나라에 따라 무지개 색을 달리 규정한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지역에서는 음양오행을 기초로 구성된 다섯 가지 순수한 기본 색 ‘흑백청홍황(黑白靑紅黃)’으로 엮어 오색 무지개라고 한다. 영미 지역에서는 남색과 보라를 같은 색으로 보고 여섯 가지 색 무지개라 하고 이슬람권에서는 빨강·노랑·초록·파랑, 이렇게 네 가지 색으로 무지개를 칭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일곱 빛깔 무지개는 프리즘을 이용한 분광 실험을 통해 일곱 가지 스펙트럼으로 구분한 뉴턴의 영향으로 당시 기독교 문화에서 7이라는 숫자에 대한 상징성을 부여했다는 추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무지개는 207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니 참으로 미묘하고 다채로운 색의 세계가 신기하다.

오색 무지개를 구성하는 오방색의 보편적인 감성을 살펴보자.
흑(黑), 중국 진시황제가 특히 좋아했다는 검은색은 힘과 단결력을 강조한다. 반면에 이슬람 국가 여성의 검은색 차도르는 일체의 욕망을 잠들게 하는 금욕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백(白), 흰색은 순결과 고귀함, 시작과 부활을 의미하는 동시에 슬픔의 색이기도 하다.

청(靑), 서양에서 푸른색은 희망과 그리움의 색이지만 중국에서는 거칠고 사악함을 표현할 때 사용했다.

홍(紅), 붉은색은 사랑과 정열, 생명력을 나타내는 반면에 부도덕의 색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중세 시대에는 빨강 머리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으로 악마의 색으로 상징된 적도 있었다.

황(黃), 노란색은 우주 에너지와 생명, 깨달음의 색이기도 하며 시기와 질투의 색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색이란 보는 이의 감정과 환경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어 오색이 아우르는 자연의 에너지에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있겠다.

19세기 중엽 영국 라파엘 전파의 창단 멤버였던 존 에버렛 밀레이(1829~1886)의 그림 ‘눈먼 소녀’에는 무지개가 등장한다. 삶의 무게가 남루한 옷차림에 확연히 드러나고 무릎에는 손풍금이 올려 있는 것으로 보아 거리의 악사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양이다. 소나기가 지나갔는지 물러가는 먹구름 끝에 쌍무지개가 걸쳐 있다. 그림은 언니의 망토로 갑자기 내린 비를 피했던 어린 동생이 무지개를 향해 몸을 돌려 그 장관에 대해 언니에게 일러주는 찰나를 포착한 듯하다. 언니는 눈이 멀어 그 풍경을 볼 수 없어 동생의 손을 잡고 동생이 표현하는 언어로 마음에 풍경을 그려볼 뿐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상상해 본다. 그녀는 무지개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 아니면 사고로 시력을 잃고 기억에 의존해 무지개를 떠올리는 것일까? 그녀의 표정에 불행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고 평온하기까지 하다. 동생이 표현해 내는 아득한 무지개의 풍경을 새소리와 지나가는 소나기가 선사하는 바람의 향기에 실어 흠뻑 취해 있는 듯하다. 작품 ‘눈먼 소녀’에서의 무지개는 아련한 희망으로 표현되었다. 성경에서 노아의 홍수 이후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시는 물로 벌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징표로 무지개를 보여준 것처럼 무지개는 그림의 소녀에게 희망과 위안의 메시지 같다.

우리의 인생에도 황금빛 들판에 지나가 버린 먹구름 끝에 쌍무지개가 드리우고 촉촉한 대지에 산들바람이 불어와 오색의 꿈과 희망을 품게 될 그 순간이 오지 않을까…. 현실은 힘들고 어두울 수 있지만 희망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으로 다가올 수 있다. 색채가 가지는 다의적인 상징처럼 내가 직면한 어려움과 현실도 뒤집어 보면 좋은 의미일 수 있을 것 같다. 얼굴에 닿는 봄날의 미풍이 비단결같이 느껴질 듯하다. 힘을 내자. 봄이 왔다.

하태임 화가·삼육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