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6.03.31 03:00
김태훈 여론독자부장
이달 초 서울시가 설립을 허가한 호텔신라의 한옥호텔 자리는 조선총독부가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기 위해 세운 박문사(博文寺) 터였다. 이곳에서 1939년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이 이토의 아들에게 "아버지의 죄를 사죄한다"고 빌었고 이 일로 그에겐 '변절자'의 낙인이 찍혔다.
훗날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 여사는 외삼촌 안준생이 이토를 사살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힘겨운 삶을 살았으며, 그날의 사과는 일제(日帝)의 회유와 압박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끈질긴 회유와 모진 협박이 있었다 한들 안준생이 버텨줬다면 우리는 민족 영웅의 아들이 친일 반역자가 되는 불편한 역사와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올 초 대만 출신 걸그룹 가수 쯔위가 대만 국기를 흔든 동영상이 공개된 뒤 중국에 사죄했다. 차라리 가수를 그만두고 말지 사과는 왜 했단 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대만인들은 쯔위를 비난의 제단에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동영상을 공개한 가수 황안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고, 사과를 강요했다며 JYP와 중국 네티즌들을 한목소리로 성토했다. 대만인들은 더 나아가 쯔위를 단결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쯔위는 사건 후 대만인의 박수를 받으며 귀국해 중졸 검정시험을 치렀지만 안준생은 해방 후 몰래 들어와 병마와 싸우다 쓸쓸히 죽었다.
1939년의 사죄는 총독부 관리가 동행한 것으로 볼 때 '연출된 쇼'가 분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안준생이 아닌 그를 겁박한 총독부를 규탄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해자 앞에서 피해자끼리 싸우는 길을 택했고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일제는 안준생의 사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 싸움을 부채질했다. 중국은 그러지 못했다. 대만인들의 대응을 지켜보고는 사태를 서둘러 봉합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서울 교육청이 친일인명사전을 일선 학교에 강제 배포했다. 서울시청 도서관에 들러 세 권짜리 두꺼운 명부를 꺼내 읽었다. 4390명이나 되는 친일 인사 명단을 본 아이들이 민족적 모멸감을 느낄 것을 생각하니 참혹했다.
혹자는 "친일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따질 것이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엔 '매일신보·만선일보 등 국책 기관지의 국장급 이상과 논설부장 논설위원'이 포함돼 있다. 이 중 매일신보는 민족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하루아침에 총독부 기관지가 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곳의 많은 기자가 이후 친일 기사를 썼다.
그런데 1918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5회에 걸쳐 이 신문에 실린 시리즈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당시 일제는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을 계기로 '일본과 조선은 하나'임을 선전하라고 매일신보에 지시했다. 기자들은 그 지시에 따랐다. 하지만 기자들은 '조선인들이 일본 여자와 결혼해 잘 살았다'고만 쓰지 않고 '아이들까지 일본말만 쓰고 일본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이것은 친일의 증거일까, 항일의 증거일까.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 기사를 읽고 분노하는 한편, 항일 정신 고취의 진심을 행간에 담고자 한 기자의 의도를 염화미소처럼 알아챘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런 숨은 분투를 담아내지 않는다. 역사의 가해자 앞에서 우리끼리 물어뜯는 비극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훗날 안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 여사는 외삼촌 안준생이 이토를 사살한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멍에를 지고 힘겨운 삶을 살았으며, 그날의 사과는 일제(日帝)의 회유와 압박에 의해 강제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끈질긴 회유와 모진 협박이 있었다 한들 안준생이 버텨줬다면 우리는 민족 영웅의 아들이 친일 반역자가 되는 불편한 역사와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올 초 대만 출신 걸그룹 가수 쯔위가 대만 국기를 흔든 동영상이 공개된 뒤 중국에 사죄했다. 차라리 가수를 그만두고 말지 사과는 왜 했단 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대만인들은 쯔위를 비난의 제단에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동영상을 공개한 가수 황안을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고, 사과를 강요했다며 JYP와 중국 네티즌들을 한목소리로 성토했다. 대만인들은 더 나아가 쯔위를 단결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쯔위는 사건 후 대만인의 박수를 받으며 귀국해 중졸 검정시험을 치렀지만 안준생은 해방 후 몰래 들어와 병마와 싸우다 쓸쓸히 죽었다.
1939년의 사죄는 총독부 관리가 동행한 것으로 볼 때 '연출된 쇼'가 분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안준생이 아닌 그를 겁박한 총독부를 규탄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해자 앞에서 피해자끼리 싸우는 길을 택했고 그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일제는 안준생의 사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이 싸움을 부채질했다. 중국은 그러지 못했다. 대만인들의 대응을 지켜보고는 사태를 서둘러 봉합하는 길을 택했다.
최근 서울 교육청이 친일인명사전을 일선 학교에 강제 배포했다. 서울시청 도서관에 들러 세 권짜리 두꺼운 명부를 꺼내 읽었다. 4390명이나 되는 친일 인사 명단을 본 아이들이 민족적 모멸감을 느낄 것을 생각하니 참혹했다.
혹자는 "친일한 것은 사실 아니냐?"고 따질 것이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친일인명사전 수록 대상엔 '매일신보·만선일보 등 국책 기관지의 국장급 이상과 논설부장 논설위원'이 포함돼 있다. 이 중 매일신보는 민족지였다가 경술국치 이후 하루아침에 총독부 기관지가 되는 비운을 겪었다. 그곳의 많은 기자가 이후 친일 기사를 썼다.
그런데 1918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5회에 걸쳐 이 신문에 실린 시리즈를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당시 일제는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을 계기로 '일본과 조선은 하나'임을 선전하라고 매일신보에 지시했다. 기자들은 그 지시에 따랐다. 하지만 기자들은 '조선인들이 일본 여자와 결혼해 잘 살았다'고만 쓰지 않고 '아이들까지 일본말만 쓰고 일본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도 보도했다. 이것은 친일의 증거일까, 항일의 증거일까. 식민지 조선인들은 이 기사를 읽고 분노하는 한편, 항일 정신 고취의 진심을 행간에 담고자 한 기자의 의도를 염화미소처럼 알아챘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런 숨은 분투를 담아내지 않는다. 역사의 가해자 앞에서 우리끼리 물어뜯는 비극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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