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삶의 향기] 옛 조선총독부 건물, ‘역사의 흉터’인 것을

바람아님 2016. 5. 17. 23:38
[중앙일보] 입력 2016.05.17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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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낙
한국현대미술관회 회장


얼마 전 서울시립역사박물관에서 독일인 울프 마이어 교수가 ‘서울 건축 100년’이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했다. 독일 베를린대학과 미국 시카고 I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그는 세계 유명 도시의 근현대 건축물을 건축미술사적 시각에서 평론하는 것으로 많이 알려진 데다 특히 한국 건축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인물로 유명하다.

서울에 산재하는 건축물을 열거하며 진행한 그의 강의를 통해 필자는 우리 주변에 훌륭한 건축물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서울 곳곳에 ‘대못’처럼 박혀 있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건축물을 언급하던 마이어 교수가 옛 조선총독부 건물 사진을 보여주며 훌륭한 건축물이 아쉽게도 식민지 시절의 문화 유물이라는 이유 때문에 철거되었다고 지적하는 것 아닌가. 듣기에 따라서는 미술사적으로 뜻있는 건물이 우리 사회 이념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역사적 열등감의 소치로 사라졌다는 얘기 같아 기분이 언짢았다.

조금 억지스러운 가설이긴 하지만 만약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 독일이 파리 베르사유 궁전 바로 앞에 더 크고 화려한 나치식 건축물을 세웠다고 치자. 전쟁이 끝난 후 독일로부터 해방된 프랑스인들이 과연 “점령국이 남긴 건물을 철거한다고 부끄러운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논리로 그 건물의 철거를 반대했을까. 기회 있을 때마다 ‘위대한 국가 프랑스(La France, la grande nation)’를 부르짖는 그들의 문화 자존심을 생각하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아울러 현재 독일에서는 동독 공산 치하의 의회 건물인 ‘공화국의 궁전(Palast der Republik)’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동독이 의도적으로 파괴했던 옛 베를린성(城·Berliner Schloss)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필자는 마이어 교수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지 자못 궁금하고, 한편으론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지혜가 아쉽게 다가왔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해 혹독한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그것은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자초한 것이다. 요컨대 독일은 전쟁의 피해자도 아니요, 제국주의가 극성을 부리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가 상처 입은 우리 역사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놓고 당시 국내 여론은 극렬하게 양분되었다. 치욕스러운 역사도 역사이니 후손이 잘 보존해야 한다는 일부 정치권과 학계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총독부 건물 철거에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비판도 일었다. 심지어 어느 저명인사 부부는 이 문제 때문에 이혼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고 한다. 남편이 철거를 주도한 정부의 중책을 맡는다면 부인이 이혼하겠다고 강하게 협박했다고 하였듯이 우리 사회가 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놓고 얼마나 격렬하게 대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조선총독부 건물 문제와 관련해 필자는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다시 한번 치를 떨 수밖에 없다. 조선을 무력 강탈한 일제는 왜 하필이면 총독부 청사를 경복궁 바로 코앞에 세웠을까? 세울 자리가 없어서? 결코 아니다. 그건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의 혼을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17세기에 지은 베르사유 궁전보다 훨씬 이전에, 중국의 자금성보다도 25년 앞선 1395년에 건립한 우리 경복궁의 역사성을 생각하면 더욱더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는 도시의 기능화, 현대화라는 미명 아래 창경궁(昌慶宮)과 종묘전(宗廟殿)을 넓은 도로로 분리해 놓았다. 게다가 그 넓은 ‘신작로’가 돈화문(敦化門) 앞을 바짝 지나가도록 해 우리 문화 유적지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심지어는 창경궁의 격을 낮추기 위해 동물원을 들여놓고 이름까지 창경원(昌慶苑)으로 바꾸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를 우리나라 주요 문화유산인 경복궁 복원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미술사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침략국이 남긴 ‘역사적 흉터’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이성낙 한국현대미술관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