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례지만, 이분 눈길이 어색하다. 왼쪽 눈동자가 바깥으로 쏠렸다. 아뿔싸, 사시(斜視)다. 뺨은 살짝 얽었다. 마마가
다녀간 자국이다. 표정도 딱딱하고 어둡다. 복색으로 보니 지체가 높겠다. 뉘신가, 이분. 일흔세살의 좌의정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다. 영·정조의 두터운 신임으로 관운이 일찍 트인 그였다. 삼정승 중 두 자리가 빈 채
독상(獨相)으로 수년간 정사를 오로지했을 정도다. 오죽하면 사관이 '100년 이래 처음 있는 인사(人事)'라고 했을까.
누구도 치부는 들키고 싶지 않다. 채제공의 마마와 사시도 기록에는 없다. 오직 초상화에 나온다. 만인지상(萬人之上)에 오른 그도 모델이 되면 민낯을 못 숨긴다. 조선의 초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겉만 아니라 속까지 뒤지는 붓질로 겉볼안을 펼친다. 채제공은 속내를 미리 털어놓는다. 그림 왼쪽에 자필로 썼다. '너의 몸 너의 정신은 부모 은혜. 너의 이마에서 너의 발꿈치까지 임금 은혜. 부채도 향도 임금 은혜. 꾸며놓은 한 몸, 무언들 은혜가 아니랴….'
이 초상화는 정조의 특명으로 그려졌다. 채제공은 감읍했다. 하사품인 부채와 향주머니를 보란듯이 들었고, 태깔 고운 화문석 위에서 연분홍 둥근 깃 시복(時服) 차림으로 멋을 부렸다. 그린 이는 화원 이명기다. 도화서의 한 식구였던 김홍도도 얼굴 그림에서는 한 수 접은 실력파다. 그릴 때 자기 결점을 감춰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혹 없었을까? 천만에, 조선 초상화에 곡필(曲筆)은 없다. 채제공도 마찬가지였다. 시선은 엇나가도 불편부당한 탕평을 옹호했다. 그 화가에 그 모델이다.
이명기 '채제공 초상' - 비단에 채색, 120×79.8㎝, 1792년, 수원화성박물관 소장
(출처 - 조선일보)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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