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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시시각각] 무기력한 한국, 활기 넘치는 미국

바람아님 2016. 6. 7. 00:17
[중앙일보] 입력 2016.06.06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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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논설실장


신문기자는 국내외 신문들을 두루 읽어야 하는 직업이다. 요즘 한국과 미국 신문은 언어 차이를 넘어 기사 제목만 봐도 한눈에 구분할 수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건 등…. 한국 신문에는 분노와 비극의 감정들로 흘러넘친다. 정부는 연일 얻어맞는 동네북 신세지만 항상 마지막에는 “정부가 나서달라”고 요구받는다. 반면 미국 신문에는 인공지능·우주개발·전기차·자율주행차 등 신산업의 눈부신 성과가 지면을 도배한다. 활력이 넘친다. 가장 인기 있는 뉴스 메이커도 정부 관계자가 아니라 민간기업의 억만장자들이다.

지난주 아마존의 제프 베저스는 “모든 공장을 대기권 밖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거는 지구에, 공장은 우주에’라는 거창한 비전이다. 그는 “우주는 지구와 달리 24시간 내내 태양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며 “우리가 우주로 나가야 지구를 지킬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이 세운 우주 기업 블루오리진을 통해 에너지와 환경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괴짜 벼락부자의 사치스러운 취미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시대 첨단기업의 구루들이 대거 우주 개발, 인공지능, 드론에 뛰어들고 있다. 우선 베저스와 X스페이스의 일론 머스크(전기차 테슬라 대표)는 로켓 회수-재발사 경쟁이 한창이다. 여기에 폴 앨런(마이크로스프트 공동 설립자)과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까지 우주사업에 가세했다. 드론에도 아마존·구글·페이스북 등 정보기술(IT) 공룡들이 모조리 뛰어들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분야들에 가장 먼저 소리 없이 뛰어든 인물이 베저스라는 점이다.

인공지능 하면 우리는 구글의 ‘알파고’를 떠올리지만 미국은 다르다. 아마존이 1년 반 전에 내놓은 AI 비서 ‘에코’가 인공지능의 대세다. 199달러에 이미 300만 대 이상이 팔렸다. “알렉사!”라고 부르면 에코가 깨어나 주인의 목소리에 따라 음악을 틀어주고 피자를 주문한다. 아이들과는 감성 어린 대화도 나눈다. 에코의 돌풍에 뒤늦게 부산해진 쪽이 구글과 애플이다. 구글은 AI 비서 ‘구글 홈’을 선보였고, 애플은 음성 스피커에다 카메라까지 장착한 AI 신제품을 들고나올 모양이다.

의외로 베저스가 가장 뜨고 있는 분야는 정치다. 2013년 인수한 워싱턴포스트(WP)를 통해 미 공화당 대선주자 트럼프와 한창 전쟁 중이다. 트럼프는 WP가 여자 문제, 부동산 거래, 거짓말 등 약점을 폭로하자 “WP는 베저스가 아마존을 보호하기 위해 헐값에 매입한 장난감”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베저스의 포석이 더 치밀하다. 마틴 배런을 WP 편집국장에 앉힌 것부터 신의 한 수였다. 배런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스포트라이트’에 등장한 올곧은 편집국장의 실제 주인공이다. ‘보스턴 글로브’ 시절 탐사보도팀이 가톨릭 사제의 아동 성추행과 교회의 조직적 은폐를 폭로하도록 이끈 인물이다. 그런 배런 국장이 20여 명의 WP 기자들로 뒤를 캐고 있으니 트럼프로선 등골이 서늘할 만하다.

아마존은 블랙프라이데이 기간을 빼면 남아도는 90%의 서버를 임대해 주는 클라우드 사업의 선구자다. 고도의 보안을 요구하는 미국 CIA까지 6억 달러에 아마존과 클라우딩 계약을 맺었다. 이뿐 아니다. 미 정부가 오랫동안 독점해 온 우주산업도 민간기업의 가세로 눈부시게 변신 중이다. 민간기업이 정부를 압도하면서 미국은 에너지가 넘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기업들은 잔뜩 움츠린 채 눈치만 살피고 있다. 과연 베저스가 한국이라면 성공했을까? WP 인수에 대해 “돈으로 여론을 장악하려는 의도”라며 몰매를 맞았을 것이다. 우주로 공장을 옮기면 “국내 일자리를 돌려달라”며 귀족노조에 멱살을 잡혔을지 모른다. 그래서인지 한국의 성공한 벤처기업가들은 은둔형이 많다. 미국처럼 꿈을 주기는커녕 ‘튀면 죽는다’며 몸을 숨긴다. 한국 대기업들의 지나친 몸조심도 불길하다. “불황에 거상(巨商) 난다”지만 지금은 투자할 조짐조차 없다. 일본도 “호황은 좋다. 하지만 불황은 더 좋다”는 격언이 희미해지면서 경제가 시들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국내외 신문을 읽은 적이 없다.

이철호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