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에 제목이 있다. '완당 선생이 하늘이 닿은 바다에서
삿갓을 쓴 모습(阮堂先生海天一笠像)'. '완당'은 조선 말기
학자이자 서예가인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호다.
'하늘이 닿은 바다'는 어딜까. 그가 귀양살이한 제주도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에서 8년을 견딘 그다. '허소치가
그렸다(許小痴筆)'는 글도 보인다. '소치'는 문인화가
허유(許維·1807~1892)의 호다. 그는 김정희가 아낀 제자다.
스승을 뵈려면 목숨을 하늘에 맡겨야 했는데, 제자는
그 험한 바닷길을 세 차례나 오갔다.
이 그림 제자가 유배지의 스승을 그린 작품이다. 뭣보다
옷거리에 눈이 간다. 귀양 사는 처지에 관복(官服)은 당치
않지만 명색이 고관 출신인데 삿갓과 나막신은 뜻밖이다.
구김이 간 겉옷도 변변찮다. 손시늉은 묘하다. 왼손은
넘실거리는 수염을 붙들고 오른손은 단전에 갖다 댔다.
다만 얼굴이 편안해 보인다. 눈썹과 눈매가 섬약하나
낯빛은 온화하고 웃음이 인자하다. 여전히 생뚱스러운 건
삿갓에 나막신 차림이다. 그림에 사연이 있을 성싶다.
스승의 귀양살이를 제 눈으로 본 제자는 가슴이 아렸다.
소동파(蘇東坡)의 옛일이 떠올랐다. 동파가 유배 시절 길
가다 폭우를 만났다. 삿갓과 나막신을 빌린 그가 옷자락을
쥐고 진창에서 뒤뚱거리자 사람들이 보고 웃었다.
천하제일의 문장가인 동파도 딱한 꼴이 될 수밖에 없는 곳이
배소(配所)다. 스승의 동파 사랑은 유난했다. 그걸 아는
제자는 스승을 비 온 날의 동파 옷차림으로 바꿔 그렸다.
요즘 말로 '동파 코스프레'다. 스승을 동파와 같은 반열에
놓고 싶었던 것이다.
찬찬히 보니, 김정희는 초탈한 표정에 가깝다. 동파는
찬찬히 보니, 김정희는 초탈한 표정에 가깝다. 동파는
쩔쩔맸다는데 말이다. 이로써 비극을 꿋꿋이 건너는
김정희의 이미지 하나가 생겼다. 제자 잘 길러 복 받은
스승이다.
(출처-조선일보 2012.04.15 손철주 미술평론가)
'김정희 초상'… 원제 '완당선생해천일립상', 허유 그림,
종이에 담채, 51×24㎝, 19세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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