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文,社會科學/歷史·文化遺産

[숨어 있는 세계사] 민족 달라 수백 년간 갈등… 영국 EU 탈퇴로 분열 위기

바람아님 2016. 6. 30. 08:37

(출처-조선일보 2016.06.30 기획·구성=김지연 기자/ 공미라 세계사 저술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마찰]


14세기엔 국가 합병 두고 전쟁

16세기엔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 잉글랜드 왕위 차지하려다 엘리자베스 1세에게 사형당하기도


국민 62%가 브렉시트 반대하는 스코틀랜드, 영국서 독립 추진 

 

최근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가 결정돼 지구촌이 요동을 치고 있어요. 

유럽 공동체를 만든 지 4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래요. 

브렉시트(Brexit·영국을 뜻하는 'Britain'과 탈퇴를 의미하는 'exit'의 합성어)는 영국 국민의 찬반 투표로 결정되었는데, 

개표 결과 찬성은 51.9%였고 반대는 48.1%였어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경우 62%나 'EU 잔류'를 선택했다고 해요.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브렉시트는 스코틀랜드 독립을 묻는 또 다른 투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어요.


영국은 여러 국가가 합쳐진 나라예요.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스코틀랜드·웨일스와의 통합(1707), 아일랜드 왕국과의 연합(1800),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과 

북아일랜드 잔류(1922) 등을 거쳐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지요. 그러니 스코틀랜드 여론이 전체 영국 여론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랍니다.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에 사는 켈트족과 잉글랜드에 사는 앵글로색슨족은 오랜 기간에 

걸쳐 끊임없는 갈등을 겪어 왔거든요.


◇좁은 다리 이용한 스코틀랜드가 승리한 '스털링 전투'


1296년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의 땅을 침략하면서 두 나라 사이에는 전쟁이 벌어졌어요. 

당시 잉글랜드의 군사력은 스코틀랜드보다 한참 앞서 있었어요. 잉글랜드 군대는 손쉬운 승리를 예측했지요.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어요. 

13세기 후반 시작된 전쟁은 14세기 초반까지 이어져 결국 스코틀랜드의 독립으로 끝나거든요.

13세기 스코틀랜드 스털링 전투가 벌어진 좁은 다리 위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대군을 무찌르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에요.
13세기 스코틀랜드 스털링 전투가 벌어진 좁은 다리 위에서 스코틀랜드군이 
잉글랜드 대군을 무찌르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에요. /위키피디아
1297년 스코틀랜드의 스털링 성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은 쓰디쓴 전술의 패배를 맛보았다고 해요. 
스털링 다리는 기병(말을 탄 병사) 2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아주 좁은 다리였답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이 다리를 잉글랜드 기병대가 중무장한 채 아주 천천히 건너왔어요. 
이어서 잉글랜드 보병(걷는 병사) 수만 명과 웨일스에서 데려온 지원군도 다리에 발을 들였어요. 
그런데 그때 별안간 다리 양옆에서 "공격하라!"는 우렁찬 소리가 들렸어요. 스코틀랜드군의 함정이었죠. 
명령이 떨어지자 창을 든 스코틀랜드 병사들이 높은 지대에서 빠른 속도로 돌진해왔어요. 
피할 곳도 없는 좁은 다리에서 수많은 잉글랜드 군사들이 탈출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죠.

두 여왕끼리 부딪치기도 했어요

엘리자베스 1세(왼쪽),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왼쪽), 메리 1세.

스털링

그렇다면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언제부터 통합의 발판을 마련했을까요? 
1603년 잉글랜드의 강력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을 겸임하면서부터예요. 두 나라는 전쟁을 막기 위한 화해 수단으로 왕실 정략결혼을 병행했어요. 
그러다 보니 엘리자베스 1세가 자식을 남기지 않자, 왕위를 계승할 사람이 스코틀랜드 왕 한 명으로 좁혀진 거죠. 
그렇게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1명의 왕, 2개의 나라'를 유지하다, 1707년 '통합법'을 만들어 공식적으로 
한 나라가 되었어요. 계속해서 이어지던 두 나라 간의 갈등이 이젠 한 나라의 내부 분열로 전환된 것이지요.

잉글랜드의 유례없는 강력한 여왕 엘리자베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여왕 메리 1세가 벌인 감정 대결도 
참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랍니다. 1542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지 6일 된 갓난아기 메리 1세가 여왕의 자리에 올랐어요. 
메리는 그 후 프랑스로 가서 궁정 교육을 받으며 귀하게 자랐고, 17세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 왕비가 되었답니다. 
건강이 안 좋던 프랑스 왕이 결혼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메리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여왕 역할에 집중하게 되었죠.

당시 잉글랜드를 통치하던 엘리자베스와 스코틀랜드의 메리는 따지고 보면 친척 사이였어요. 
그러나 늘 비단길을 걸어온 메리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가시밭길만 걸어왔죠.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사형을 당한 비운의 왕비였거든요. 
엘리자베스는 여왕이 되기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위기를 넘어야 했어요. 
일부 사람은 엘리자베스를 "어머니 없는 사생아"라며 스코틀랜드의 메리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게다가 메리도 이에 동조했어요. 
"사실 나는 잉글랜드 여왕이기도 해. 엘리자베스는 사생아잖아." 엘리자베스는 심한 모욕감을 느꼈어요.
그러던 중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분쟁과 반란이 일어났고, 메리가 민심을 잃어 여왕 직에서 쫓겨나게 됐어요. 
메리는 친척인 엘리자베스에게 편지로 도움을 요청했어요. 지난 세월 자신이 준 고통은 잊은채 말이죠. 
그리고 잉글랜드로 도망쳤어요.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메리를 환영해주는 대신 20여년간 이 성 저 성에 갇혀 지내도록 만들어버렸답니다. 
1586년 메리는 잉글랜드 왕위를 탐하는 역모를 꾸미다 들통나 사형에 처해졌어요.

브렉시트를 계기로 우여곡절 끝에 합쳐진 나라가 다시 분열 위기를 맞았어요. 
스코틀랜드는 결국 다시 독립을 하게 될까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국기가 합쳐진 지금 영국의 '유니언잭'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지 
세계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때입니다.


'스털링 전투'

(클릭하면 큰이미지 가능)



17세기 에든버러성 삽화

(클릭하면 큰이미지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