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 2016.07.04 13:52
1년 반 뒤인 2017년 말 미군이 평택으로 떠나면, 111년 만에 용산(龍山)이 한국 품으로 돌아온다.
일본은 1906년 4월 대한제국으로부터 서울 용산 일대 부지 300만평을 사들였다. 일본은 이곳에 조선 주둔군 기지를 건설했다.
일제(日帝) 패망 이후 70여년간 용산은 줄곧 주한 미군 기지로 사용됐다.
[上] 용산기지 문화재 르포
이 나라 근·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용산에서 111년 만에 외국 군대가 떠나고 그 자리에 71만평짜리 초대형 공원이 만들어진다.
한·미는 지난 2003년 7월 용산의 주한 미군 기지를 경기도 평택으로 이전하는 데 합의했다. 이 합의에 따라 주한 미 8군사령부의 선발대가 지난 5월 평택 기지로 이전한 것을 시작으로 내년 말까지 미군 본대가 모두 평택으로 옮겨 갈 예정이다. 다만 한미연합사령부는 용산 기지에 남게 된다. 북의 어떤 도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한·미 동맹의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소수의 연합사사령부 인력과 시설이 용산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조선왕실 제천행사 열리던 곳,
1906년 대한제국이 日帝에 넘겨
美軍, 日이 남긴 건물 대부분 재활용
곳곳이 근·현대사 유적
정부는 미군 부대가 용산을 떠나면 이후 소파 협정에 따라 반환 협의 및 매각 절차를 끝내고 이곳에 대한 환경 평가 및 문화재 조사 등을 거쳐 2027년까지 235만㎡(약 71만평)에 이르는 부지에 역사·문화·생태 공원을 짓는다는 계획이다. 조선일보는 지난 6월 TV조선과 함께 기지 이전 작업이 막 시작된 용산 기지 내부를 취재했다. 용산 기지는 그간 언론 접근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던 곳이다.
용산 기지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구한말 외국 군대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양 도성 바깥 주민들이 살던 삶터였고, 조선 왕실 제천 행사가 수시로 벌어진 곳이었다. 현재 용산 기지를 사용 중인 미군은 일제 강점기 당시 건물을 대부분 재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지 곳곳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정부는 용산이 가진 역사·문화적 특성을 최대한 살린 생태 공원을 만들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토부는 지난 4월 이곳에 경찰박물관, 여성사박물관 등 정부 각 부처가 요구하는 8개 시설을 유치하겠다고 발표했다가 "역사를 망각한 부처 간 나눠 먹기"라는 비판을 불렀다. 111년 만에 한국 품으로 돌아오는 용산의 올바른 개발 방향을 찾기 위해 용산 기지를 미리 살펴봤다.
'日帝의 아방궁'으로 불렸던 총독 관저 자리엔
서울 용산 삼각지에서 이태원로를 따라 국방부를 지나 이태원 쪽으로 500m만 가면 오른쪽으로 미8군 용산 기지 사우스포스트로 들어가는 게이트(문·門)가 나온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설치된 바리케이드를 지나자 100년 넘게 숨겨졌던 용산의 역사가 눈앞에 펼쳐졌다.
광활하다고 할 정도로 넓은 잔디밭에 옛 건물들이 속속 눈에 들어왔다. 기지 구획은 1906년 당시 일본의 조선 주차군(임시 주둔군)이 대한제국으로부터 부지를 구입해 기지를 건설한 이래 큰 변화가 없다고 한다.
◇조선의 아방궁, 총독 관저 터
'미8군로(路)'를 따라 남하한 뒤 'X군단 대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자 121병원이 나왔다. 1960년대 초 경기도 부천에 있던 후생병원을 이곳으로 옮겨놨다. 병원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총독 관저가 있던 곳이다. 1904년 러·일전쟁 후 건축된 총독 관저는 '조선의 아방궁'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했다. 총독 관저는 1960년대 초 철거되고 그 자리에 121병원을 지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총독 관저에서 뒤편 언덕에 있는 군사령부까지 지하 터널이 조성돼 있었다. 터널은 콘크리트를 부어 폐쇄한 상태다. 일본군 사령부 청사는 광복 후 미 7사단 사령부로 사용되다가 6·25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됐다.
국방부 청사가 보이는 헬기장 앞 교차로에 흰색 페인트를 칠한 분묘용 석물(石物) 2기가 서 있다. 미군 측은 "역사적으로 무의미한 조각상"이라고 했지만, 석물은 일제 강점기 이전 이곳에 있던 마을 무덤들과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된다. 마을 이름은 둔지미였다.
◇캠프 코이너와 조선 왕실 제단
사우스포스트에서 고가도로를 타고 이태원로를 가로지르면 메인포스트가 나온다. 메인포스트 북서쪽에 캠프 코이너가 있다. 전쟁기념관 북쪽이다. 캠프 코이너 동쪽에는 둔지산이 있다. 높이 65m짜리 작은 산이지만 조선 시대 왕실은 이곳에 산천(山川)에 제사를 지내는 남단(南壇)을 짓고 수시로 제를 올렸다. 남단 터가 있는 낮은 언덕은 군무원 사무실이 들어섰다. 남단 흔적은 사무실 마당에 남아 있다.
조선王이 기우제 지냈던
'南壇' 남아 있어
마당 두 귀퉁이에 화강암 돌무더기가 쌓여 있다. 기둥으로 쓰였을 각진 화강암과 주춧돌이 둘로 나뉘어 철제 펜스 안쪽 잡초 속에 누워 있고, '문화재이니 훼손 금지'라는 영문 안내판이 서 있다. 용산 기지 역사를 연구해온 향토사학자 김천수(38)씨는 "몇 년 전 문화재청 기초 조사에서 이곳의 역사적 의미가 밝혀진 후 미군 측이 설치한 구조물"이라며 "반드시 보존되고 복원돼야 할 유적"이라고 했다.
◇日帝 전몰자 충혼비를 미군 기념비로 '재활용'
메인포스트 나이트필드 연병장 앞에 교차로가 있다. 교차로 모퉁이에는 6·25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8군 전몰자 기념비가 서 있다. 원형 7단 기단 위에 돌기둥 7개가 서 있고 한가운데에는 전몰자를 기리는 표석이 서 있다.
'一誠貫之' 새겨진
日포병대 국기게양대도
日병영건물 거의 그대로 활용…
현관 입구에 일본군 '★'표시
원래 이 기념비는 1935년 11월 일제(日帝)가 일본군 제20사단 78연대의 만주사변 전사자를 위해 세운 충혼비였다. 6·25가 끝나고 미군은 이 충혼비를 재활용해 6·25전쟁 미8군 전사자 기념비로 사용했다. 1980년 78연대 자리에 한·미연합사 청사가 들어서면서 기념비는 교차로 부근으로 자리를 옮겼다. 미군이 일본군 구조물을 재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만주사변에서 목숨을 잃은 일본 군대를 기리던 시설이 전몰 미군 장병 기념비로 변신한 것이다. 이렇듯 작은 기념비에도 복잡다기한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응축돼 있다. 김영규 공보관은 "미군을 기리는 기념물이니 당연히 (평택으로 옮겨가는)대상"이라고 했다. 그 왼편에는 일제 때 사용했던 병영 건물들이 남아 있다. 현관 입구 지붕 아래에는 일본군 상징인 오각 별 흔적이 보였다.
메인포스트 북쪽 주유소를 지나면 '위수 감옥'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 헌병대 감옥이었다. 현재 위생부대로 쓰이고 있다. 미군 막사 몇 동을 제외하면 옛 건물은 일제 당시 그대로다. 해방 후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이 감옥에 수감돼 있다가 재판을 받았고, 붉은 벽돌로 세운 육중한 담장에선 6·25 때 생긴 총탄 구멍을 셀 수 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동행한 미군 공보실 직원이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라고 했지만, 대한민국 근현대사가 그대로 각인돼 있다.
◇군사 고문단 청사와 78연대 문기둥
나이트필드 연병장 뒤편은 한·미연합사 건물이다. 연합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큰 건물은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JUSMAG-K)' 건물이다. 일본군 장교 숙소였던 이 건물은 1946년 한국 신탁통치안을 논의하는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숙소로 사용됐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듬해 6월 29일 미군이 철수한 후 건물은 미 군사 고문단 청사로 사용됐다. 지금은 그 후신인 주한미합동군사업무단이 쓰고 있다.
군사업무단과 연합사 사령부 사이로 만초천이 흐른다. 남산에서 발원해 한강으로 흐르는 개울이다. 구불구불한 자연 하천인 만초천은 일본이 기지를 만들면서 직선화됐다. 죽은 천(川)이었지만 2011년 서울시에서 하수 처리 시설을 만들면서 맑은 물로 돌아왔다. 만초천을 건너 연합사 건물로 가는 다리는 일제 강점기 때 그대로다. 1908년 일제는 이곳에 6사단을 만들면서 다리와 철문을 세웠다. 정문 문기둥과 작은 옆문 문기둥, 그리고 다리는 일부 사라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100년 전과 동일하다.
취재를 마칠 무렵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에게 미군 헌병대가 다가와 신원을 확인하고 돌아갔다. 기지 내 누군가가 기자 일행을 신고한 것이다. 용산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1987년 노태우 大選 공약… 중단·지연 30년 우여곡절
지난 5월 16일 미(美) 8군 사령부의 선발대 10여명이 서울 용산기지를 떠나 평택기지로 옮겨갔다. 한·미(韓·美) 간에 용산기지 이전 문제가 공론화된 지 거의 30년 만이다. 나머지 미 8군 사령부 선발대 병력 300명도 내년 2월까지 순차적으로 평택기지로 이동해 기지 이전 준비 작업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이어 내년 상반기에는 미군 본대(本隊)도 용산을 떠날 예정이다. 주한 미군 사령부를 비롯한 다른 부대들도 내년 말까지 평택 이전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용산기지에는 소수 한·미 연합사 인력과 시설만 남게 된다.
용산기지 주둔 부대와 미 2사단이 옮겨갈 평택기지는 지난 5월 기준 89.5%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용산기지와 미 2사단을 포함해 미군기지들의 평택기지 이전 사업에는 약 16조원이 들어간다. 이 중 한국 측이 8조8600억원을, 미국 측이 7조1000억원을 각각 부담한다. 먼저 사업을 제안한 측에서 주로 비용을 부담한다는 원칙에 따라 용산기지 이전비용은 한국이 더 많이 부담하게 됐다.
선발대, 두달 전부터 평택기지로…
본대는 내년 상반기 떠나
내년말까지 기지 이전 완료
용산기지 이전은 1987년 당시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선거 공약으로 공론화됐다. 그러나 이후 몇 차례 중단되거나 지연되는 등 우여곡절을 거쳤다. 주한 미군 핵심 부대들이 서울을 떠나 한강 이남으로 이전하는 것이 자칫 북의 오판(誤判)을 부를 수 있다는 안보 측면에서의 우려가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논란을 거치면서 용산 기지 이전 목표 시기도 당초 1996년에서 2006년, 2008년, 2011년, 2015년, 2017년으로 여러 차례 연기됐다. 한·미 양국은 1990년 6월에 1996년까지 용산기지를 오산·평택 지역으로 완전 이전키로 합의했다.
그러나 대체부지와 이전 비용을 둘러싼 한·미 간 이견으로 김영삼 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5월 용산기지 이전은 사실상 백지화되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3년 4월 한·미 양국은 미래 한·미 동맹 정책구상(FOTA) 회의를 통해 용산기지 이전 협상을 다시 시작했다. 2003년 5월 한·미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조속한 용산기지 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대체부지 규모와 이전 비용을 둘러싼 양국의 이견 때문에 협상은 1년 넘게 진통을 겪었다.
2004년 8월 양국은 FOTA 11차 회의에서 용산기지 UA(이전협정) 및 IA(이전합의서)에 가서명했고, 그해 10~12월 국무회의 의결과 국회 비준 등을 거쳐 법적인 절차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이전 부지인 경기도 팽성읍 대추리 지역 등에서 주민 및 일부 반미 시민단체가 토지 수용에 반발해 물리적인 충돌이 빚어지면서 2006년 5월에야 토지 수용에 착수할 수 있었다.
2007년 3월 평택 미군기지 건설 청사진인 종합시설계획(MP)이 발표됐고 그해 12월 평택기지 기공식이 열렸다. 그 후 9년여 공사 끝에 용산기지의 평택 이전이 시작된 것이다.
/유용원 군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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